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유당 (문단 편집) === 원외 자유당의 창당 배경 === 1951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은 광복절기념사를 통해 농민과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새 정당을 만들 의사를 밝혔다. 이후 8월 25일 이승만은 신당 조직에 관한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에서 그는 신당은 대부분이 노동자·농민 등 근로대중으로 조직되어야 하고, 민간단체인 경우 개인 자격으로 가입하는 것을 허락하겠다는 등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원외에서의 정당 조직은 국무총리·국방장관이었다가 1951년 초 주중대사로 나가 있던 [[이범석]]이 8월 말 귀국함으로써 속도가 빨라졌다. 그는 당시에 해체되었으나 여전히 막강한 조직력을 과시하고 있는 [[조선민족청년단]](족청)계의 지도자였다.[* 많은 자료에서 자유당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국민회]]·대한부인회·[[대한청년단]]·대한노동조합총연맹·대한농민조합총연맹 등 ‘5대 사회단체’를 기간으로 해서 만들었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신당 조직 과정을 자세히 보면 각 단체에서 결의해 대표를 파견한 일도 없었고, 각 단체의 대표가 참가한 것도 아니었다. 5개 단체는 자유당 창당의 기간단체가 아니었다. 이승만이 담화에서 말한 대로 개인적으로 참여했으나 각각의 단체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단체에서 나왔다는 의미의 대표라고 기록되기도 했다.] 그는 원내 자유당에서 나온 신정동지회 또는 신정회라고 불리는 원내교섭단체의 창설자이기도 했다. 이승만의 세계관, 정치관에서는 [[민주국민당]]을 필두로 하는 [[한국민주당]]계 의원들이 지주, 자본가 등 부유계층을 대표하는 정당이었으며 대통령으로서 마땅히 절대다수 노동인구를 대표하여 이들 계급정당에게서 보호해야 한다고 보았는데, 그래서 이승만 친위였던 '원외 자유당'의 본디 이름은 자유당도 보수당도 아닌 '''통일노농당'''이었다. 당시에도 이 이름은 좀 많이 쇼킹(...)했는지 원외신당과 원내신당의 합당협상을 결렬시킨 시비거리중 하나였다. 재밌는 것은 통일노농당이 자유당으로 이름을 바꾼 건 합당 협상을 진척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는데, 결국 통합이 무산되면서 애꿎은 당명만 바꿔 동명의 당이 두 개가 되는 꼴이 돼버렸다. 원내 자유당 측은 "당명이 같다는 그 이외에 아무런 공통성도 발견할 수 없다"며, "통일노농당이 자유당으로 참칭한 것은 본 자유당과 합류할 전제라 했고 본당에서는 그들을 위하여 문호를 개방한 채 있다. 통일노농당이 본 자유당에 합류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자유이나 아무런 이념적인 변경도 없이 자기의 본래의 이름을 버리고 남의 명칭을 혼칭하는 것은 그 의도가 어디에 있던 분별 없는 것"이라며 비판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201170032920100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2-01-17&officeId=00032&pageNo=1&printNo=1670&publishType=00020|기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