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유당 (문단 편집) == 악행과 몰락 == 자유당은 시간이 지나자 일당독재를 일삼기 시작했다. 임시수도 [[부산광역시|부산]]에서 이들이 첫번째로 벌인 것은 야당(민주국민당, '''원내 자유당'''[* 이후 원내 자유당은 신정동지회 출신 국회의원들의 합동파(삼우장파), 공화구락부 출신 국회의원들의 잔류파로 분열되어 따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한다. 이후 삼우장파는 원외 자유당에 입당하고, 잔류파는 [[장택상]]을 중심으로 [[헌정동지회]]를 결성한다.]) 국회의원의 버스를 끌고간 다음에 협박을 해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찬성하게 한 것이다. 바로 "[[발췌 개헌]]". 직선제로 한 이유는 당시 이승만의 인기가 자유당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발췌 개헌 직후에 열린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별다른 경쟁자가 없이 무난히 승리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조봉암]], [[신익희]][* 신익희는 유세 중 호남선을 타고 가다 뇌일혈로 급서했다.]와 힘겹게 싸워서 온갖 부정부패를 통하여 승리하고 조봉암은 사법살인으로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내부에서는 부정부패가 심해서 사방에서 구린내가 진동했다. 사실 자유당의 부정부패가 심했던 이유 중 하나는 이승만 자신이 공무원들의 월급을 적게 줬던 것이 한몫했다. 왜냐면 이승만은 [[열정 페이|공직자들은 나라에 대가를 받고 일하는 것이 아닌 봉사하는 정신으로 일해야 한다고 공직자들의 월급을 엄청나게 적게 잡아]] 당시 한국의 공무원 월급이 통근전차요금도 안될정도였다. 그야말로 쥐꼬리만한 수준으로 주다보니, 공무원과 군인들이 생활고에 시달릴수밖에 없었고 미군이 준 원조물자나 군수물자들을 팔아버리는 일이 빈번했다. 그래서 보다못한 백선엽이 이승만을 찾아가서 장교들 월급이 너무 박해서 장교들이 보급받은 c레이션을 팔아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군인들의 월급을 올려달라고 청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승만은 그렇게 올려주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면서 공무원 의식 개조를 위해서는 월급을 올릴 수 없다며 거절해버렸는데 그 결과는 시망. 애초에 조선 왕조에서도 이런 식으로 박봉을 줬다가 부정부패가 판을 쳐 나중에가면 조선이 멸망하는 원인이 되었다. 조선 왕조를 그렇게 혐오했던 이승만이었지만 결국 같은 짓을 하고 있었던 것.[* 공무원의 월급을 무턱대고 올린다고 부정부패가 사라지는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공무원의 월급을 무턱대로 낮추면은 부정부패는 필연이다. 공무원도 설령 처자식이 없더라도 제 한 목숨은 있으니...] 끝내는 자유당이 이승만의 종신 출마를 위한 개헌을 시도했는데 의석수가 2/3에서 한 명 모자라 '''[[사사오입 개헌]]'''이란 사상초유의 병크를 터트렸다. 그러나 정작 사사오입 개헌으로 3선 출마를 하게 된 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위에 기술한 대로 신익희, 조봉암과 힘겨운 승부를 벌였으며, 부통령 선거에서는 아예 당 후보로 나선 이기붕이 낙선하고 야당 후보 [[장면]]이 당선되었다. 그리하여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대한민국 부통령|부통령]]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 이승만의 경우엔 야당 후보인 [[조병옥]]이 급사하면서 사실상 자동 당선이었다. 그러나 당시 이승만은 이미 팔순이 넘은 고령이었고, 건강 상태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승만이 설령 당선되어도 임기를 다 채울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자유당에서도 유사시 대통력직을 승계할 부통령 선거에 총력전으로 나섰다. 웃기게도 정작 이승만은 196'''5'''년에 죽어 자유당의 부정 선거는 결과적으로 어느 쪽으로든 뻘짓이 되었다(...)] '''[[3.15 부정선거]]'''로 '''지지도 90%'''를 이뤄냈다.[* 대구에서 개표가 시작되자마자 자유당에서조차 기겁할 정도였다고 한다. '''대통령 지지율이 99%에 육박한 곳도 있었다고.''' 심지어 일부 지역에서는 '''유권자 수보다 이승만, 이기붕의 표가 많았다고 한다.''' 결국 이승만은 70%, 이기붕은 그보다 조금 낮은 수치로 '''수정되어 발표되었다.''' 그나마도 위에서 지시한 수치보다도 높았다고(...)] 결국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4.19 혁명]]'''이 일어났고, 견딜 수 없었던 [[이승만]]이 [[하야]]하고, 이기붕이 아내인 [[박마리아]]와 함께 아들인 [[이강석(1937)|이강석]]에게 살해됨으로써 자유당 정권은 붕괴했다. 자유당의 악행이 너무나도 심했던지, 당시에는 힘 센 아이가 애를 때려놓고는 "왜 때리냐?"고 물으면 '''"난 자유당이다!"'''라고 하곤 했다고 한다.[* [[노무현]] 前 대통령 회고록 <성공과 좌절>] 당시 자유당의 멸망에 대해 유행처럼 떠돌았던 문구는 다음과 같다. >자유당은 두 가지 [[암]](癌)으로 죽었는데, 하나는 [[프란체스카 도너|프란체스카]] 암이요, 또 하나는 [[박마리아]] 암이었고[* 두 사람은 각각 이승만과 이기붕의 부인이다.] > [[최인규]][* 내무부 장관으로 3.15 부정선거를 총지휘했다]는 강심제 주사를 놓다가 바늘부터 부러진 격이다.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시대 배경이 바로 이 시대이며, 내용 자체도 자유당과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고 있는 내용이다. 물론 그 하나를 비판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만은 아니지만. 위와 같은 병크와 흑역사 때문에 국내의 [[자유주의]] 정치 세력들은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자유당'이란 공식 명칭과 약칭을 쓰지 못하고, 다른 단어와 자유라는 단어를 붙이고, 자유가 아닌 약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실제로 당명에 자유라는 단어가 들어있는 정당들을 살펴보면, [[민주자유당]]의 약칭은 민자당, [[자유선진당]]의 약칭은 선진당, 전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이 요구하는 약칭은 '한국당'이지만 자유한국당에 반감이 큰 민주·진보계열 인사들과 그 지지자들은 자유한국당을 지칭할 때 자국명인 '한국'을 붙이기 싫고, 이승만이 하야한 자유당과 [[박근혜]]가 탄핵당해서 쫒겨난 자유한국당의 이미지가 겹치며,[* 참고로 이승만도 [[위임통치 청원 사건]]으로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 자리에서 탄핵당한 이력이 있다.] 이승만을 [[건국절|국부라며 미화하니]] 일부러 '자유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비슷한 사례로 [[열린우리당]]의 약칭인 '열우당'이 있는데, 하필 '열우'가 못난 친구들(劣友) 혹은 못나고 어리석은(劣愚) 당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열우당이라는 이름을 꺼리고 '우리당'을 선호했으며, 언론에서는 '열린당'으로 표현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당명 개정 초기에 그걸 잘 아는 민주당의 [[홍영표]] 당시 [[환노위|환노위원장]]은 순순히 한국당이라고 안 불러주고 일부러 자유당이라고 부르면서 도발했고 그러자 [[엄용수]] 의원은 "야!" 하면서 반발하기도 했다.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404948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