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유도시 (문단 편집) == 발전 == 자유도시라고는 하나, 중세 성기 초입 당시의 자유의 개념은 현대의 자유와는 조금은 달랐다. 중세의 자유도시들은, 일반화 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개별의 사례가 전부 상이한 [[봉건제]] 특유의 계약을 기반으로 한 귀족 계층, 성직자 계층과 구분되는 또 하나의 정치적 주체들을 묶을 수 있는 개념에 가깝다. 사실 중세 유럽은 행정 능력은 극히 부족했으나, 가톨릭 교회가 보전한 [[고대 로마]]의 유산 덕에 법적인 개념 자체는 비교적 풍부한 편에 속했다. 게르만족의 관습에만 의존했다면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영주 XX의 영역이다.'라고 말하면 끝날 것을 교회 덕에 '영주 XX에게 이 지역의 사법권, 십일조 징수권, 금지령권, 징집권, 시장세 징수권, 벌금 징수권을 부여한다.'라고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왕권이 바닥을 치던 중세 혼란기에는 그저 표현을 고급스럽게 하는 것에 불과했고, 저런 그럴싸한 표현과 무관하게 영주들은 관습과 무력에 기반한 자의적 지배를 행했다. 하지만 사회가 안정되기 시작한 11세기부터는 위에서 서술한 것과 같이 고대 로마에서부터 전해진 도시 공동체에 대한 기억을 기반으로 도시 주민들이 스스로 조직화하여 정치적 주체로 떠올랐다. 도시의 대부분은 [[장원(농업)]]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영주에 의해 지배되는 일은 별로 없었다. 한 마을에 섞여 살더라도 누구는 A 영주, 누구는 B 주교의 지배를 받거나, 주교는 사법권과 징세권을 행사하고 영주는 징집권을 행사하고, 주교는 교회법 법정을 주최하고 영주는 세속법 법정을 주최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여려 영주들이 대단히 복잡하게 지배권을 행사했다. [[농노제]] 문서에서 보듯, 시간이 흐를수록 자유민과 농노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면이 있었는데, 일반적으로는 몇 가지 대표적인 인신 상의 예속이 강제되는지 여부로 판단하였다. '인신 상의 예속이 되었는가' 를 구분하는 가장 대표적인 것은 결혼세와 같은 게르만의 관습에서 유래한 납세 항목과 부역에 대한 동원 여부였다. 코뮌에 의한 자치가 퍼지기 전 도시민을 이루는 주 계층은 첸수알레스(Censuales)였다.[* 한국 역사학에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는 개념이라서 이렇다할만한 번역어가 없다. 일본의 한 논문에서는 제단민(祭壇民)이라고 옮겼다. 당대 문서에서 사용된 용어는 첸수알레스이나, 이하 서술에서 교회 예속민으로 언급된 서술들도 다 이 첸수알레스를 말한다고 보면 된다.] 이들은 교회에 예속된 예속민으로서, 농촌에 예속된 예속민인 [[농노]]와는 법적으로 구분되는 계층이었다. 농노와 다르게 거래와 이주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다만 인두세와 상속세와 결혼세가 부과되었다. 10세기 말엽 귀족들이 [[십자군 전쟁|신앙심이 깊어지고]], 유럽의 경제가 활성화되자 귀족에 예속되어 있던 사람들 중 일부가 귀족에게 돈을 지불하여 '이전 주군의 위령 미사를 바치는 조건'으로 교회의 예속민으로 주군을 갈아탄 것이다. 도시민의 투쟁, 즉 코뮌 운동은 대체로 이러한 책임과 위에서 말한 관습에 기반한 자의적 지배에서의 [[해방]], 즉 성문화 된 [[공화주의|법과 계약에 의거해]] 지배 받는 것을 주요 목표 중 하나로 삼았다. 도시들은 자치권을 얻기 위해 다양한 방법과 과정이 필요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그냥 자유민들이 무력을 행사해서 영주나 주교를 '''쫓아내버리고''' 자치를 행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경우로, 시민들이 주교를 조지고 자치를 획득한 [[리에주]],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은 [[플랑드르]] 지역들의 도시 자치가 있으며, [[스위스]] 동맹 역시 [[합스부르크]] 가문이 황제가 되고 오스트리아로 본거지를 옮기자 본래 영지인 합스부르크 백작령에는 신경을 못 쓰는 사이, 합스부르크 가문이 잠깐 제위를 잃자 그 틈을 타 무력으로 독립선언을 한 것이었다.[* [[베른]], [[취리히]] 같은 자유도시들은 아예 영토국가 수준으로 주변 영지들을 하나씩 합병하여 넓혔고, 나중에 아얘 [[스위스 연방]]에 통째로 가입하였다.(...) 합스부르크의 탈환시도도 무력으로 저지시켰다.] 물론 이러한 시도가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플랑드르에서는 이러한 시도가 잘 먹혀들어갔지만, 캉브레처럼 주교가 인근의 [[백작]] 등 귀족에게서 지원을 받아 유혈진압되는 사례도 있었다. 그래서 왕과 귀족들은 머리가 커진 자유민들을 별로 달가워하진 않았다. 이를테면 [[프랑스]]는 [[카페 왕조]] 이래로 [[프랑스 파리|파리]]가 공식적인 [[수도(행정구역)|수도]]였으나, 프랑스 왕들은 성질 더러운 파리 시민들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고 파리에 직접 입성해서 살기보단 파리 근교에 궁전을 짓고 지내는게 보통이었으며,[* [[베르사유 궁전]]이 대표적이다.] 영국의 수도 [[런던]]도 왕조차 런던 시민들의 자치에 간섭하는 것이 매우 제한되었기에 이 문제를 두고 왕이 런던 시민들과 권력 싸움을 벌이는게 흔했다.[* 이러한 흔적은 [[시티 오브 런던]]으로 남아있다.] 한편 자유도시를 역으로 이용해보자고 생각한 군주들도 있었다. 특히 왕이나 황제의 입장에서, 지방 영주들에게서 그런 강력한 자유민 집단이 [[독립]]해나간다는 것은 곧 [[제후]]들의 [[힘]]이 약해진다는 뜻이었으므로, 도시들에게 자치권을 수여하는 것은 귀족을 [[견제]]하기에 매우 좋은 수단이었다. 이에 군주들은 직접 [[칙령]], 특허장을 도시들에게 줘서 지위를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그 구체적 내용을 보면, 일반적으로 도시는 영주에게 예속되지 않고 군주에게 직접 [[세금]]을 바치고 군주 직속 군복무 의무를 지니며, 군주는 자치적인 입법권과 사법권을 행할 수 있게 인정해주는 교환이 이뤄졌다. 이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신성 로마 제국]]의 자유 제국시(Freien Reichsstadt)와, 프랑스 [[필리프 2세]]가 시작한 모범 자유도시(ville de [[프랜차이즈|franchise]])다.[* 도시는 부유한 [[재정]]으로 세금은 물론 양질의 병력을 제공할 수 있었는데, 이 점이 군주의 [[권력]]에 큰 보탬이 되었다. 군주들이 도시에서 이익을 취한 몇 가지 사례를 보면, 필리프 2세가 [[부빈 전투]]에서 다국적 [[연합군]]을 상대로 승리하는 데에도 일조하였고, 신성로마황제들이 교황 지지세력이나 유력 제후를 상대할 때도 큰 도움을 주었다.] 한편, 교회와 도시민 상호 간에 대한 태도는 복잡했다. 많은 경우 전통적으로 도시영주는 주교였고,[* 서로 격이 다른 영주가 넷이나 있었던 [[아미앵]]처럼 도시 내 공동영주가 둘 이상 존재하는 경우도 있으나, 보통 이들 영주 사이에는 권리와 영역이 나뉘어있거니와 주교가 백작이나 성주 등 다른 영주보다 도시에 대한 영향력이 강한 경우가 많았다. 당장 아미앵에서는 백작도 주교에게 거의 봉신으로 행세하였을 정도.] 도시가 성장해나가는 과정에서 상당수 도시민은 인근 장원에 속한 농노 등 부자유민이었다가 대금을 지불하고서 자기 보호자, 즉 주군을 도시 주교로 바꾸어 교회 장원공동체나 도시공동체에 적을 두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도시민이 된 후에는 [[상인]]이나 [[장인]], 기타 임노동자로 살아갔고, 혹은 도시주재 ministerialis로서 주교의 가신이 되어 도시 행정 및 사법 업무에 종사하였다. 이렇듯 교회는 도시민의 지배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도시민의 축재와 신분상승 등에 기여하는 존재였다. 도시민이 더 많은 [[권리]]를 향유하려고 할수록 교회와 충돌하는 빈도가 커졌으나, 코뮌 운동이 벌어지던 시기는 곧 지역교회(현지 주교)와 중앙교회([[교황청]]), 세속군주([[신성로마황제|황제]]) 간 갈등이 벌어지던 시기이기도 해서, 교회와 시민이 서로 피흘리며 싸우는가 하면, 상호 간 이해가 일치할 때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서로의 [[존재]]와 [[권리]]를 지지하기도 하였다.[* 전자의 경우는 교황의 편에 가담한 주교에 맞서 황제의 편을 들어 자치권을 획득하려했던 [[독일]] 주교도시, 돈이나 무력으로써 주교를 몰아내려고 했던 몇몇 북부~중부 [[프랑스]] 및 북이탈리아 도시들이 있다. 후자의 예시로는 개혁교황 시대에 교황청의 간섭에 맞설 세력을 자기 도시에서 구했던 지역주교나 자기 권역에서 새 주교구/도시가 분구해나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주교 및 시민 일동(...) 등이 있다.] [[12세기]]에 들어 [[경제]]와 [[상업]]이 활성화되면서 자유도시의 위상은 더욱 높아진다. 자유도시가 설치되면 시장이 설치되어 상인들을 유입시킬 수 있어서 인구가 자연히 증가하고 수공업자들도 정착해서 미개발된 지역의 개발에 큰 역할을 했다. 특히 독일 지역은 도시 자치법의 발전 및 [[대장장이]], 탐광꾼, [[광부]] 등 금속 공업자들이 도시 발달에 큰 역할을 했다. [[동방식민운동]]도 그런 자유 도시 설치를 통해서 독일 상인들이 [[동유럽]]으로 유입된 것이었다. [[신성로마제국]]에서는 [[13세기]] [[아우크스부르크]], [[쾰른]] 등이 자치권을 보장받은 자유도시가 되었다. [[15세기]] 이후로는 자유도시(Freie Stadt)와 제국시(Reichsstadt), 자유 제국시(Freien Reichsstadt)라는 이름이 동의어처럼 쓰이게 되었다. 자유 제국시들은 다른 영방 국가 제후에 비해 정치적 권력은 미약했지만 [[제국의회]]의 참석권과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밖에도 [[프랑스]]에서는 지방별로 세 유형이 있었는데, 각각 북부의 [[코뮌]] 도시([[https://fr.wikipedia.org/wiki/Ville_de_commune|ville de commune]])와 중부의 모범 자유 도시(ville de [[프랜차이즈|franchise]]), 남부의 [[집정관]] 도시([[https://fr.wikipedia.org/wiki/Consulat_(Ancien_R%C3%A9gime)|ville de counsulat]])로, 이 중 북부의 코뮌 도시와 남부의 집정관 도시가 중부의 자유 도시보다 더 많은 자치권을 누렸다. 상술하였듯 모범자유시는 국왕에게 직접 특허를 딴 대신 꽤 많은 의무를 졌다. [[영국]]의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 [[그레이터 런던]]이 아니다. 그레이터 런던은 광역시로서, 원래 [[시티]](city)나 [[보로]](borough) 등으로 불리던 여러 별개 도시들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탄생했다.]도 일종의 자유시였으며, 지금도 그 독특한 [[전통]]을 변형해서 운용하여 [[조세피난처]]로 활용되고 있다. [[농노]]가 도시로 도망쳐서 1년+1 일동안 잡히지 않으면 자유민이 되었는데, 이것은 도시가 영주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에 기인한다. 영주의 지배를 받지 않으니 영주의 사법권 같은 권한도 적용되지 않았고, 따라서 도시에 거주하는 농노도 영주의 사법권을 적용받지 않았던 것. 문서 상단에 언급된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 만든다'는 것은 이 도망농노들에 대한 이야기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