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유의지 (문단 편집) === [[신학/기독교]] === 기독교 신학적 예정설: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출발한 [[예정설]]을 편의상 결정론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정론과는 큰 차이가 있다.예정론은 결정론과 다르다. 결정론에 따르면 인간의 운명이 미리 정해져 있으며, 인간은 그 운명에 항거할 수 없는 기계적이고 수동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예정설은 시간상 원인관계 순서가 아니라 신학적 설명을 위해 논리적으로 도출'''된 것이다.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는 신적의지도 제한받는다고 보았다. 창조주라 하더라도 스스로 만든 법칙에 이탈할수 없다고 봤다. 그러나 이런식의 접근은 초기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와 그를 이어받은 근대 아우구스티누스 학파(The modern Augustian School), [[오컴의 윌리엄]]이 대표적인 새로운 길(via moderna)노선에서는 옛 노선인 스콜라적 보편주의 방법론[* 새로운 길과 대비된다 하여 옛 길(via antiqua)라고 부른다.]비판했고, 이러한 논쟁은 기독교 내부에서도 중요한 논제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대체로 신은 인과 관계나 물리법칙 같은 스스로 정한 제약에 구속받지 않고 인간의 이성과 능력을 뛰어넘는 존재이나 "스스로 인간을 위해 자신의 능력과 신적의지를 제한했다" 정도로 정리된다.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의 기독교 교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는 당시 헬라어로 표현된 성경에서 autexousia라는 단어를 로마시대 스토아 학파들이 쓰는 ''Liberum Arbitrium''으로 번역했는데 이는 법학자 출신 테르툴리아누스의 언어적 상상력이 떨어지는 상당한 졸역으로[* Alister E. Mcgrath의 저서 참조] 원래의 원어 의미는 '행동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지는것' 정도고 현대 영어로는 authority over oneself 정도로 표현된다. 흔히 자유라는 의미의 Liberty, Freedom 과는 의미상 차이가 있다. 그래서 기독교의 인간의 자유 의지는 '인간의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이 있는가'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행동 책임을 온전히 질 수 있는가' 라는 신학적 명제와 관련있다. '''그러니 기본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심끝에 기존 번역 단어를 수용하며 논리상 수사학적 설명을 열심히 깃들였지만 이 난해함 덕분에 훗날에까지 많은 오해를 사게 만들었다. 5세기 아우구스티누스 시기, 당시 지식인들은 로마법의 영향으로 "인간은 행동으로 평가 받는다" 원칙에 익숙했다.[* 그래서 아프리카인 아우구스티누수는 인기가 없었고, 브리튼 섬 출신 수도사 펠라기우스의 설이 유행했다. 펠라기우스는 어디까지나 인간은 행동은 전적으로 책임을 감수해야하며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성서에 기반한 기독교 신학은 인간을 행위로 평가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실존적인 측면에서 인간을 바라본다. 인간 이미 고통받고 비참한 상태이다. 예외없이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이다. 어떤 인간도 도덕적 행위를 완벽하게 할 수 없으며 자신의 행위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 이 때문에 자유의지는 있으나 무력해진다고 본 것이다. 기독교의 세계관에서 [[신]]은 전지전능하므로 [[시간]]이나 공간같은 물리적 제약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원인과 결과 법칙에서 자유롭다. 그러나 인간은 신과 같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행동에 대한 결과를 알지 못할 때도 선택을 해야 할 수도 있고, 의도 없이한 행동으로 죄를 짓기도 한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주어져 있다. 일상에서 선택의 자유, 예컨대 점심 메뉴를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 같은 일반적 자유의지는 무력하지 않지만, 인간의 종교적 죄악을 다투는 자유의지는 원죄로 타락하여 무력하다. 무슨말이냐면 선과 악의 경계점에서 선택할 자유가 주어지면 자유의지는 악으로만 향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있는 이성, 자신의 선함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타고 나지만 죄를 짓고 싶은 욕망이 더 강하기에 죄를 지을수 밖에 없다. 이 때문에 욕망에 따라 죄를 짓는 동시에 양심의 고통을 받는다. 마치 알콜, 마약중독자들 처럼 후회하고 후회하면서 계속하여 중독에서 벗어날수 없는 처지와 같다. 이처험 인간은 자유의지는 무력하기에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고, 결국엔 죄로 손상된 자유의지를 회복하는건 타력으로만 (신의 도움)으로만 가능하다. 요약하자면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기에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진다. 그러나 인간은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기엔 무력한 존재이다. 이를 회복하는건 인간 자력으론 불가능하다. 신의 구원이 필수적이다 그렇다고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진 못한다. 경험적으로 세상엔 선함을 쫓기보다 악을 행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고, 이들은 완전해 질수 있는 신의 도움을 자유의지로 거부하기에 필연적으로 신의 은혜를 받는 사람은 적다. 이처럼 [[예정설]]은 기독교 교리인 인간론과 구원론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이다. 예정설 논란은 기독교 내부의 오래된 신학적 논쟁으로 아우구스티누스 시절 이래 단독설, 신인 협력설로 갈라져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논제이다. 가톨릭이나 정교회에선 예정설을 부정적이며, 개신교 내부에서도 500년간 중요한 신학적 논쟁이었다. 역사상 [[아우구스티누스]] -펠라기우스 논쟁, [[마르틴 루터]]와 에라스무스 논쟁,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 주의와의 논쟁등이 있는데 전자가 자유의지는 있으나 무력하다는 단독설 후자가 자유의지를 좀 더 긍정하며 협력할수 있다는 협력설에 속한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문단,title=자유의지주의,version=508,paragraph=11)] [[분류:철학]]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