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유중국 (문단 편집) == 역사 == [[1952년]] [[동북아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3년 동안 [[중국]] 대륙에서 [[미군정]]이 실시된다. 이 무렵 미 국무성의 전략 부문 전문가들은 [[국공내전]]이 아시아 전체의 불안을 가져온 것으로 보고 중국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 '''변방의 소수민족들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공산권 강경파인 폴 니체 국무성 정책실장이 기발한 보고서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만주]], [[몽골|내몽골]],[* 중국의 자치구인 내몽골 자치구를 의미한다. 당시 [[몽골]]은 사회주의 국가이긴 했지만 한국전쟁에 공식적으로 참전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우리가 아는 몽골은 냉전이 끝난 이후 원래 동아연방에 속해 있던 내몽골과 통일하는 식으로 연방에 가입한 듯하다.] [[위구르]], [[티베트]], [[한국]]을 합쳐 5개국 연방을 만들어 중국을 외곽에서 둘러싸고 [[러시아]]까지 봉쇄하자는 것이었다.''' 보고서는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과 국방성, 국무성을 만족시켰고 즉각 채택되었다. 군정 기간 동안 미군을 비롯한 [[미군]] 60만 명이 중국과 한국에 주둔하며 군사기지를 구축했다. [[1953년]] 3월, 중국분할안이 공개되고, 당연히 [[장제스]]를 비롯한 [[중국 국민당]] 고위층은 결사반대했지만, [[더글러스 맥아더]] 군정장관은 장제스를 불러 분할안에 반대하면 군정종식 후 중국의 통치자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겠다고 위협하자 어쩔 수 없이 수락한다. [[1954년]] 4월 25일, 중국에서 미군정이 끝나가던 해에 중국 베이징 중난하이의 미 군정청 회의실에서 소수민족 5개국 연방 결성을 위한 13번째 회담이 열린다. 여기서 연방 결성의 최대 난관이었던 영토 문제를 해결하고 최종안이 제시되며 [[동아연방]]이 구성되고, 자유중국은 기존 중국의 영토를 대부분 상실한다. 게다가 [[칭다오]]를 일본에게 200년간 조차하게 되고, [[웨이하이]]는 미국령이 된다. 이듬해인 [[1955년]]에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반공]]세력을 형성하는 자유중국과 [[일본]]을 포함하는 8개국[* 동아연방을 구성한 자치공화국 5개국을 합한 숫자.]의 집단방위조약인 동아시아조약기구를 설립한다. 동아시아조약군은 자유중국과 동아연방에 주둔한 25만 명의 미11군과 각국의 상비군을 주축으로 구성됐고 최고사령부는 베이징에 있으며 역대사령관은 미군이 맡게 되는 등, [[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아시아판 NATO|아시아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군대였다. [[1979년]]~[[1983년]] 동아연방 대통령으로 [[박정희]]가 취임했을 때 자유중국은 티베트를 침공하지만 연방군대에 의해 격퇴된다. 그리고 [[2010년]] 동아연방 월드컵 개최에 자유중국이 참석하고, 16강까지 진출하는데 이때가 현대의 시점. 중국이 사상 최초로 16강에 진출해 축구 열기가 대단히 끓어올랐다. 그러나 경기 당일날 연방에 거주하는 중국인들과 자유중국인들이 [[마오쩌둥]]과 [[오성홍기]]가 그려진 카드섹션을 하고 [[의용군 행진곡]]을 부르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하고, 경찰을 투입하여 이들을 제지하는 와중에도 이들은 화염병까지 던져대면서 경기를 방해하여 도중에 경기가 중단된다. 그 시점에서는 동아연방이 3:0이라는 일방적인 점수로 앞서고 있었는데, FIFA에서는 관중 입장 없이 제3의 장소에서 잔여시간만큼 경기를 한다고 발표했으나 자유중국 측은 완전 재경기를 요구했고 받아들여지지않자 아예 선수단을 철수시켜버렸다. 그 덕인지 동아연방은 무사히 8강에 진출하는데 성공했지만, 중국인들이 대대적으로 동아연방을 비난하는 시위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