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작센 (문단 편집) === 구 작센 (Altsachsen: ~ 1180년) === 원래 작센(3세기~1180년)은 [[라인강|라인]]·[[엘베강|엘베]] 두 강 사이의 오늘날의 [[니더작센]] 주와 [[슐레스비히-홀슈타인|홀슈타인]], 그리고 북부 [[베스트팔렌]]에 해당하는 지역을 의미하며, 현재의 작센 주와는 관련이 없다. [[엘베 강]] 동쪽의 땅은 [[서로마 제국]] 말기에 일어난 [[게르만족의 대이동]] 이후에 슬라브화되었다가 나중에 중세 이후 [[동방식민운동]]으로 다시 독일화되었기 때문에 당시 작센은 북독일에 해당했다. 게르만족의 일파인 작센(Sachsen)족은 200년경부터 이 영역에 정주했다. 독일의 [[부족 공국|5대 부족]] 중 가장 북쪽에 위치했으며 바다와 접했기 때문에 해상으로의 진출과 무역도 활발했다. 5세기경 작센족(영어명 색슨족)의 일파가 [[그레이트브리튼 섬|브리튼 섬]]을 정복한 것도 바로 [[북해]] 연안을 근거지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앵글로색슨족]]이 되었다. 앵글족과 색슨(작센)족이라지만 앵글족은 거의 사멸했고, 색슨족이 대부분이었다.[* 즉, 우리가 백인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현대의 [[영어권]] [[백인]] 민족들 대부분이 독일계를 뿌리로 둔다.] 476년 [[서로마 제국]] 붕괴 후 여러 게르만 왕국들이 건설될 때, 작센족도 작센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웃에 있는 [[메로빙거 왕조]]의 [[프랑크 왕국]]과는 느슨한 관계를 이어갔으나 인접국 관계인 만큼 수시로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찌감치 기독교화된 브리튼 섬의 앵글로색슨족이나 다른 게르만족들과는 다르게 여전히 [[앵글로색슨 신화|전통적인 이교]]를 믿고 있었으며, 이르민술이라는 거대한 기둥 혹은 나무를 신성시했다고 한다. 7세기경 작센 왕국의 힘은 강성해졌고 이웃 [[프랑크 왕국]]과 자주 전쟁이 발생했다. 침공과 보복 침공 등으로 양국 간의 감정의 골이 크게 벌어졌다. 772년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 때 작센과 프랑크의 전쟁은 절정을 이루어 근 40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참혹한 전쟁이 이어진다. 상기한 이르민술도 이 전쟁 중에 파괴됐다고 한다. 이단 척결이라는 명분으로 작센과 전쟁을 했던 카롤루스는 점령 지역의 작센인들에게 가톨릭으로 개종을 강요했고 거부하는 이들은 모두 처형했다. 잔혹한 전쟁 끝에 작센의 인구가 격감할 정도가 된 800년 결국 작센은 프랑크 왕국에 병합되었지만, 작센인들은 810년까지 반란을 이어갔다. [[카롤루스 대제]]는 810년 작센을 평정한 후 이곳을 프랑크 왕국의 하위 단위인 작센 공국으로 지정했다. 카를로스 대제 사후 베르됭 조약(843년)을 통해 동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되었다. 동프랑크 왕국에서는 왕국의 하위 단위를 구성하는 독일의 [[부족 공국|5대 부족 공국]] 중 하나가 되었는데, 다른 4곳은 [[프랑켄]], [[바이에른]], [[슈바벤]], [[알자스-로렌|로트링겐]]이다. 899년 어린 [[루트비히 4세|루트비히 4세 유아왕]]이 즉위하자 주변의 슬라브족, 마자르족 등으로부터 외침이 이어졌는데, 국왕이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각 공국의 지도자들이 개별적인 지도력으로 외침을 막아내야 했다. 그결과 900년 이후 5대 [[부족 공국]]의 자치권이 크게 강화되었다. 911년 루트비히 유아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서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었고, 5대 부족 공작들과 3대 주교령 주교들이 모여 차기 국왕을 선출하게 되었다. 이것이 [[선제후]] 제도의 기원이 되었다. 서프랑크 국왕 [[샤를 3세]]가 혈통을 이유로 왕위 계승을 주장했지만 5대 공작들은 이를 씹고 독일 부족 가운데서 차기 왕을 선출하기로 하고 [[프랑켄]] 공작 [[콘라트 1세]]를 새로 국왕으로 선출했다. [[콘라트 1세]]에 이어 왕으로 선출된 이는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였다. 하인리히 1세는 [[독일왕]]을 자칭했고 이에 [[독일 왕국]]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또한 동시에 작센 왕조([[오토 왕조]])가 시작되었다. 962년 작센 왕조 출신의 [[독일왕]] [[오토 대제]]가 교황으로부터 대관을 받아 마침내 [[신성 로마 제국]]이 시작되었다. 황제 가문을 배출한 작센 공위는 신성 로마 제국에서 황제 다음가는 지위인 [[선제후]] 직위에서 세속 제후 중 첫 번째 서열이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 성립 후에 작센은 크게 4개 지방으로 분류하여 서부는 베스트팔렌,[* 서쪽의 평지라는 뜻으로 현재 지명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에도 남아있듯이 [[빌레펠트]]와 [[파더보른]], [[뮌스터]], [[오스나브뤼크]] 등의 지역], 동부는 [[오스트팔렌]],[* 동쪽의 평지라는 뜻으로, [[브라운슈바이크]], [[뤼네부르크]] 등을 일컬었다.] 북부는 노르트알빙기아,[* 현 홀슈타인 지역] 중부는 엥게른이라고 불렀다.[* [[앵글로색슨]] 중 앵글로(Anglo)의 어원이다. 현재의 [[민덴]], [[하노버]] 일대,] 작센 공작이자 독일 왕,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던 [[오토 대제]]는 황제가 되면서 작센 공위를 빌룽 가문의 헤르만에게 넘겨줬다(961년). 빌룽 가문 이후 작센 공위는 주플린부르크 가문을 거쳐 1142년 [[벨프 가문]]의 [[하인리히 사자공]]에게로 넘어갔다. 신성 로마 제국은 건국 초기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지금의 [[안할트]] 지방에 크베들린부르크나 [[마그데부르크]] 등의 도시를 세우고 국력과 투자가 집중하였는데, 작센 공작들은 이런 분위기를 타고 동부로 확장을 모색했다. 특히 [[하인리히 사자공]]은 벤드족 등 엘베 강 동쪽에 살던 슬라브족들을 격파하며 동쪽으로 적극적으로 진출하여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메클렌부르크]]와 포메른 공국까지 영토를 크게 확장했고 이곳에 [[동방식민운동|도시를 건설하여 독일화]]하였다. 그 결과 작센 공국은 엘베 강을 넘어 [[마이센(독일)|마이센]]과 [[드레스덴]]까지 닿았다. 황제보다 넓은 영토를 다스리게 된 하인리히 사자공은 선대 시절부터 라이벌이었던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와 일평생 동안 권력 투쟁을 이어갔으나 1180년 황제에게 패하면서 제국 추방령을 받고 모든 작위를 박탈당하고 영지는 몰수당했다. 이로서 사자공의 작센 공국도 몰수되어 바르바로사 황제 측근들에게 분배되었고, 유서 깊은 중세 작센 공국은 공중분해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사자공의 추방 후 [[벨프 가문]]은 거의 모든 영지를 몰수당하고 아무런 작위도 없이 사자공 모친 소유의 약간의 사유지로 연명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서 깊은 [[벨프 가문]]은 여전히 여러 제후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거의 가진 것이 없던 사자공의 아들 [[오토 4세]]는 모든 것을 빼앗아 간 바르바로사 황제의 [[프리드리히 2세|손자]]를 제치고 황제로 선출되기까지 했다(1208년). 1235년, [[제국의회(신성 로마 제국)|제국의회]]에서 바르바로사 황제가 [[하인리히 사자공]]과 [[벨프 가문]]에 가한 가혹한 조치를 다소 완화하기로 결의했다. 그리하여 몰수된 영지의 일부가 [[벨프 가문]]으로 환수되어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이 탄생하였고 이는 [[하노버 왕국|하노버 공국/선제후국/왕국]]으로 발전헸다. 한편 구 작센 공국의 영지 중 일부는 베스트팔렌 공국[* [[쾰른 선제후국|쾰른 선제후]]가 겸했다.]으로 이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