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거화 (문단 편집) === 태종 재위기 === 979년, 장거화는 [[태종(송)|태종]]이 [[북한(오대십국시대)|북한]]을 정벌할 때 종군하여 태종을 따르며 좌장고(左藏庫)를 감호하고 경동전운사(京東轉運使)로 임명되었다. 뒤에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郞), 예부낭중(禮部郞中)을 역임하였다. 982년, 강남전운사(江南轉運使)로 임명되었다. 옹희(雍熙) 연간[* 984년~987년]에 태종이 유주(幽州)를 정벌할 때 장거화는 송주(宋州)의 군량을 거마하(拒馬河)로 운송하는 것을 감독하며 하북전운사(河北轉運使)로 임명되었다. 986년, 지섬주(知陝州)로 임명되다가 부임하기 전에 《대정요록(大政要錄)》 30편을 지어 바쳤으며, 태종은 장거화의 대정요록을 열람한 뒤 조서를 내려 칭찬하고 견사 50필을 하사하며 섬주로 보내지 않았다. 뒤에 허왕(許王) [[조원희(송)|조원희]]이 개봉부윤(開封府尹)을 맡으면서 장거화는 개봉부판관(開封府判官)으로 임명되고 전중시어사 진재(陳載)가 추관(推官)으로 임명되어 모두 금자(金紫)를 받았다. 태종은 장거화와 진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1백만 냥을 하사하였다. >경들은 모두 조정에서 품행이 단정한 선비들이라 특별히 짐이 선발했으니 마땅히 내 아들을 잘 보좌해주시오. 장거화는 뒤에 좌간의대부로 임명되었으며, 태종은 다시 추밀사(樞密使) 왕현(王顯)을 보내 장거화에게 조원희를 잘 보좌하라는 뜻을 전했다. 이런 가운데 여주(廬州)의 여승 도안(道安)이 제부[* 서현(徐鉉)의 처조카였다.]의 불성실함에 대해 호소했는데, 개봉부에서는 부인의 죄를 다스리지 않고 형틀을 채워 여주로 압송하였다. 그러나 도안은 등문고(登聞鼓)를 치며 서현이 편지를 보내서 요청했는데도 불구하고 장거화가 고의로 죄를 다스리지 않았다고 보고하였다. 여기에 태종이 분노하여 장거화는 죄를 받아 안주(安州) 사마(司馬)로 폄관되었다. 곧이어 장작소감(將作少監), 지흥원부(知興元府)로 제수되었다가 흥원부로 부임하기 직전 지진주(知晉州)로 전임되었으며, 비서소감(秘書少監), 지허주(知許州)로 옮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