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국영 (문단 편집) == 소개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le12.jpg|width=100%]]}}}|| || 홍콩 스타의 거리에 있는 장국영의 동판.[br]안타깝게도 장국영의 핸드프린팅란은 비어 있다[* 이는 장국영이 사망한 다음해인 2004년 초부터 제작을 했기 때문이다.] || 생전 [[중화권]]을 대표하는 [[미남]] 스타였다.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엄청난 [[동안]]이자 [[미중년]]이었으며, 실제로 [[설운도]]보다 나이가 2살 많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 [[무한도전]] 태리비안의 해적 편에서 OX퀴즈로 해당 문제가 출제된 바 있었다. 총 7명이 풀었는데, 단 두 명(정형돈, 노홍철)만이 정답을 맞췄을 정도였고, 자막으로도 정말 경악스러운 동안이셨던 그 분이라고 표시하기도 했다.]다. 현재 살아있다면 '''[age(1956-09-12)]세'''다. [[손석희]], [[유동근]], [[톰 행크스]] 와 동갑이고 [[성룡]]과도 겨우 2살 차이밖에 안 나고 [[장 클로드 반담]]보다도 4살이나 위다. 정식적으로 국제가요제에서 입상한 후 RTV(麗的電視, ATV의 전신)와 계약하지만, 방송국과 영 조합이 맞지 않았는지 그에게 약 6~7년 간 무명기간이 존재한다. 전 매니저인 '진숙분'은 TV에서 우연히 장국영을 보고, "귀엽고 잘생긴 청년이 열심히 하는 게 맘에 들어" 그에게 협업을 제안한다. 그렇게 소속을 TVB로 바꾸고, 화성레코드와 계약하여 1983년 <풍계속취>로 제대로 된 성공을 맛본다. 물론 이 성공이 '우연히 좋은 매니저 만나서 된 것'은 아니고, 당시 화성레코드 소속이었던 [[매염방]]을 포함한 가수들이 비행기 타고 각 국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스스로를 홍보한 결과이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방화절대.jpg|width=100%]]}}}|| || [[2002년]] [[매염방]](梅艶芳)과 방화절대 콘서트 무대에서[* 우울증의 악화로 몸이 지친 상태라 끝내 앵콜 무대에는 서지 못했다. 평소 장국영의 쇼맨쉽을 생각하면 절대 생각할 수 없는 행동. 장국영은 우울증, 매염방은 자궁경부암의 병세가 깊어져 불과 1년뒤인 [[2003년]] 같은해 세상을 떠났다. 콘서트 당시에 매염방은 몰래 항암치료를 받고 있었다.] || 매염방과 진숙분이 회고하기를, 당시에는 "행사 뛰는 것=밤무대"였고, 소속사는 하루에도 스케쥴을 마구잡이로 돌렸다고 한다. 덕분에 비행기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고, [[고소공포증]]이 있던 장국영은 국경을 넘나드는 그러한 스케쥴을 더욱 더 힘들어 했다고 한다. 매염방은 그런 그를 위해 비행기 의자 밑에서는 자신이 자고, 장국영은 의자 위에서 자는 배려를 했고, 장국영은 어둠과 혼자 있는 것을 무서워하는 매염방을 위해 방 두개가 뚫린 방을 예약하곤 스탠드를 약하게 켜서 그녀를 배려했다고 한다. 이렇게 밤낮으로 힘든 일정을 열심히 소화한 결과가 누적되어 홍보도 되고 실력 또한 높이게 된 것이다. <풍계속취>는 가수로서 장국영을 메인으로 올려놓을 만큼 히트한 곡이지만, 우리나라의 '10대 가요제'와 같은 홍콩의 십대 경가금곡 시상식에서 11위를 하는 바람에 상을 타지는 못했다.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후술. 그렇게 하여 칼을 갈고 나온 노래가 1984년 . 진숙분이 상을 못타 분해하던 장국영을 위해 일본의 가수 킷카와 코지 원곡의 판권을 사서 그에게 어울리는 홍보활동을 하였고, 그렇게 초대박을 터트린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음악들은 가요 시상식에서 반드시 수상의 기쁨을 맛보게 해 주었고, 특히 1987년 나온 《Summer Romance》의 판매량은 단일 앨범 기준으로 당시에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라고 한다. 《천녀유혼》 삽입곡은 물론이거니와 <무심수면>이라는, 장국영 본인 입으로 '가장 히트한 곡'으로 언급한 곡도 포함되어 있다. '''장국영 본인은 자신의 가장 궁극적 목표로 '가수로 성공하는 것'을 언급했고, 가장 이상적인 직업은 '가수'라고 하였을 만큼''' 장국영에게 음악은 메인이요, 배우는 당시 홍콩 분위기 상 해야하는 덤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가수 부문에서 후에 레전드를 찍는 [[장학우]]의 폭발적인 가창력을 부러워했고, 장학우 역시 장국영의 연기력을 부러워하여 금방 친해졌다고 한다. 장학우는 2002년 즈음부터 장국영 사망 직전까지, 우울증을 겪는 그를 위해 자주 그의 자택으로 가서 어울렸을 만큼 장국영에게 고마운 사람 중 한 명이다. 여튼 목표였던 가수로서는 레전드를 찍었고, 《영웅본색》의 OST인 '[[當年情|당년정]]', '[[奔向未來日子|분향미래일자]]'가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유명하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가수활동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 적지만, 중화권에서는 80~90년대의 가왕 3인방으로 [[알란 탐]], 매염방, 그리고 장국영을 꼽을 정도다. 1985년부터 가수로서 안정된 성공을 보장받기 시작하자, 배우 쪽에도 신경쓰기 시작한다. 《(장국영의) 위니종정》은 장국영의 음악과 연기력이 시너지를 일으켜 히트한 작품이며, 제목에서 아예 (장국영의)라는 걸 붙여 온전히 그의 작품이라는 것으로 홍보를 할 정도였다. 후에 장국영은 <위니종정>이라는 이름의 카페를 동업자와 함께 개업하였는데, 이곳은 장국영의 물건들, 팬들의 방문 흔적들로 장식이 되어있었거니와, 종종 장국영이 와서 팬들과 간이 팬미팅을 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현재는 폐업하였다.] 배우로서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연기력 자체도 제대로 인정 받기 시작했다. 이 두 작품을 장국영의 가수 성공 후 주욱 이어진 인기의 연장선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이 두 작품은 장국영이 '얻어 걸린 것'이기 보다는, [[오우삼]] 감독이 장국영의 잠재력을 보고 1983년에 이미 《영웅본색》에 캐스팅이 된 상황이었고, 《천녀유혼》으로 인한 폭발적 인기 역시 9개월 간을 밤샘 촬영하여 고생하였던 것에 대해 보상받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상까지 탔으면 좋았겠지만, 그의 상복을 생각하면 오죽하면 1988년 콘서트에서 "혼자 상을 못받았다"며 약간 투정부릴 정도였다. 사실 장국영은 웬만한 메인 시상식에서는 한 번씩 상을 탔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가수의 최고 명예인 금침상도 1999~2000년이 돼서야 받았고, 오죽하면 인터뷰에서 "당신의 금침상은 10년 전에 받았어야 했던 것 아닌가요?"라며 기자가 질문을 했을까. 더욱이 장국영은 2002년, <[[명보]]>사[* 굉장히 유서깊고, 파파라치 짓 따위는 하지 않아 연예계에서도 제대로 인정받는 몇 안되는 연예전문 언론사다.]에서 신설한 <연예동력대장> 시상식에서 《이도공간》으로 첫 수상자가 되었는데, 이 사실을 장국영에게 알리자 "나랑 친해서 준 거 아니냐?"라고 말하면서도 굉장히 기뻐했다고 한다. 여튼 당시에는 없었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가녀린 청년 이미지'''로 아시아 전역에서 인기가 엄청났다. 우리나라에서도 장국영을 따라 5:5 가르마[* 이건 [[응답하라 1994]]의 [[삼천포(응답하라 1994)|삼천포]]를 생각해보자.]를 유행처럼 하고 다녔고, 친구들끼리 몰려다니며 빨간 물감 흐트리면서 공중전화에서 피를 흘리며 '송-호-연'을 외치다가 부스 담당이 오면 얼른 튀어버리던 학창시절이 있었다. 아마도 [[이종원]]의 <[[리복]]> CF와 함께 당시 남학생들이 가장 많이 따라한 장면이 아닐까 싶다.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으로 확 뜬 이후에는 본인이 좋아하는 시나리오를 고를 수 있어서 좋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데뷔작인 《홍루춘상춘》은 삼합회에 의해 강제적으로 찍었고, 그 뒤로 《갈채》, 《실업생》, 《연분》 등등으로 이어지는 청춘물은 본인이 이것저것 가릴 처지도 아니었거니와 돈이 필요했기에 들어오는 대로 받았다고 한다. '''다만,''' 1980년 RTHK에서 방영했던 '''이벽화(릴리안 리)[* 본명은 이백(李白). 패왕별희의 원작 소설가다.]''' 작가의 '''《아가적여인》'''과 홍콩에서 거장으로 추앙받는 '''담가명''' 감독의 1982년 작 '''《[[열화청춘]]》'''은 장국영 배우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터닝포인트를 갖는다. 바로 《아가적여인》을 보고 담가명 감독, 그리고 [[왕가위]] 감독이 장국영에게 팍 꽂혔다고 밝혔기 때문. 당시의 미남 기준으로는 좀 다른 방향으로 귀공자, 꽃미남 스타일에 연약한 느낌을 갖고 있기도 했고, 사실 장국영과 비슷한 느낌의 배우는 당시에는 아예 없었다고 봐도 된다. 《[[열화청춘]]》은 제 2회 홍콩 금상장 시상식에서 장국영을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게 해준, 장국영 배우 인생에서 없어서는 안될 작품이다. 실제로도 장국영은 《[[열화청춘]]》을 실질적인 본인의 영화 데뷔작으로 언급한 바가 있다. 1990년 은퇴 선언을 했다가 다시 복귀한 이후에는 스케일이 큰 상업영화나 홍콩 느와르 영화보다 [[작가주의]] 색이 짙은 [[예술영화]]나 저예산 영화에 주로 출연하였다. 물론 [[왕가위]] 감독과 '천카이거' 감독이 만들어 준 길이긴 하나, 장국영 본인의 노력과 재능으로 왕가위 시리즈의 첫 도입을 《[[아비정전]]》으로 안정감있게 이끌어 주었으며《[[패왕별희]]》를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으로 이끈 주역이기도 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아비정전2.jpg|width=100%]]}}}|| || 저주받은 걸작이라고 표현받는 《아비정전》[* 한국 배급사의 잘못된 홍보한 탓에 [[영웅본색]]이나 [[천장지구]] 같은 홍콩 느와르 영화를 기대한 관객들이 극장에서 단체로 환불을 해달라는 등 크고 작은 난동이 있었다는 풍문이 있었다.] || 실제로 [[왕가위]] 감독은 항상 시나리오를 쓸 때 장국영을 주연으로 생각하고 집필한다고 밝혔는데 장국영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애증의 관계가 아닐 수 없다. 《[[해피 투게더(1997)|해피 투게더]]》 역시 사실 장국영이 연기한 '보영'의 시점에서 극을 이끌어나가려 하였는데, 장국영이 홍콩 콘서트 때문에 본인 분량을 먼저 찍고 가버려 보충이 안되는 상황이었으며 분량의 모자람은 왕가위 특유의 질질 끌기 때문이었고, 결국 주연이 뒤바뀌어 버린다. 장국영은 홍콩 콘서트가 끝나고 아르헨티나에 다시 가서 약 열흘간 늘어진 자신의 분량을 연기한다. 여튼 이 애증의 관계에서 장국영 본인이 언급하기로, 《[[아비정전]]》 때 [[유덕화]]와의 추격씬을 위해 필리핀까지 날아가서 촬영을 하였는데, 갑자기 왕가위 감독이 촬영 직전 "연기할 때 지붕 조심하라고, 몇 군데 구멍이 있더라고" 웃으면서 말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땅에서 20m 위면 낮은 것도 아닌데 말을 미리 했어야지 참 황당했다고 한다. 또한 《[[동사서독]]》을 촬영할 땐 중국의 사막으로 가서 찍었는데, 투명한 어린 전갈이 장국영의 목 뒤에 붙어있었으며 검은 전갈이었으면 큰일날 뻔 했다고 한다. 그리고 《해피 투게더》 촬영 당시엔, 남미의 위생이 그리 나쁜지 몰라서 예방접종도 안하고 그냥 갔는데, 도착 3일째부터 설사가 시작되고, 약먹을 때만 괜찮아지고 하면서 증세가 반복되기에 근 3주간을 죽과 계란 흰자만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해피 투게더》를 보면 굉장히 말라보이는 장국영을 볼 수가 있다. 장국영은 웃으면서 왕가위 감독과 1번만 더 하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는 왕가위 감독과 일하지 않겠다고 농담을 던졌는데 괜히 기레기들에게 떡밥만 제공한 꼴이 되어버렸다. [[천카이거]] 감독 역시 장국영 사망 뉴스를 접하고, "말도 안된다. 이건 완전히 (패왕별희의) 데이 아닌가." 라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또한 장국영을 생각하고 시나리오를 제작한 작품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그 작품이 《무극》에서 [[사정봉]] 역할이 아닐까 팬들은 추측하고 있다. 물론 장국영이 받았을지는 의문이다. 그것은 《매란방》도 마찬가지. 한 번 했던 캐릭터는 웬만해서 다시 하지 않고 다양한 역할을 하려고 하는 장국영이기에 아마도 안 받았을 확률이 높다. 물론 장국영이 지인들이 제안하는 시나리오를 단칼에 거절하지는 못했기에 오랫동안 제작자 '황백명'의 작품[* 대부분 하세편이다. 물론 《[[천녀유혼]]》이나 《야반가성》 같은 작품도 있다.]에 불려다녔고, 결국 장국영이 '하세편'은 찍기 너무 힘들다라는 말 한마디로 더 이상 하세편에는 출연하지 않는다. 죽기 직전 그의 말기 3작품인 《색정남녀》, 《창왕》, 《이도공간》과 관련된 '이동승' 감독 혹은 제작의 작품을 거절하지 않고 찍은 것도 있다. 《색정남녀》는 베를린 영화제의 경쟁부문 후보였는데, 사실 영화 자체는 완벽하지도 않고 영화가 거친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이러한 거칠고 서툰 느낌나는 연출이 오히려 이 영화의 메인 줄거리인 '3급 영화 찍기'와 많이 어울렸으며, 예상할 수 없는 스토리와 적당한 유머 그리고 배우들의 호연으로 꽤나 괜찮은 작품이 탄생하였다. 당시 장국영 말고는 다들 신인이었고 심지어 촬영감독으로 나오는 분은 진짜 촬영감독이었다고. 지금은 중화권 대스타가 된 [[서기(배우)|서기]]와 개성있는 연기자로 큰 막문위는 이 작품이 첫 주연급 출연작이었고[* 영화 첫 출연작은 '타락천사']. 한마디로 배우 쪽에서는 장국영이 모든 걸 이끌어야 하는 상황이며 그는 감독 연습에 의의를 두어 촬영장에서도 연출부에서 할 법한 일들을 했다고 한다. 이 작품의 인연으로 1996~1997년 콘서트에서는 서기와 막문위가 특별 게스트로 나와 섹시하면서도 화려한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패왕별희칸2.jpg|width=100%]]}}}|| ||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직후 || 영화 [[패왕별희]]로 칸 영화제에 초청되어, 칸의 상징인 선착장에서 천카이거 감독과 장국영이 인터뷰를 했는데 인터뷰를 하는 분이 장국영이 홍콩에서 얼마나 유명한 배우인지 모르고, 이런 훌륭한 배우를 어디서 발굴했는지 질문을 하는데, 아마도 이때 장국영은 헐리웃에 진출하더라도[* 실제로 헐리웃 시나리오가 2편 들어왔었다고 한다.]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구나. 차라리 현재처럼 홍콩의 넘버원으로 남는게 낫다고 생각하였다고 밝힌 바있다. 참고로 《패왕별희》는 모든 것이 완벽했고, 연출진들, 스탭부터 경극 관련 장국영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까지 모두 신뢰할 만한 사람들로만 채워져 있어서 좋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 뒤로 북경에만 가면 패왕별희 스탭진들이 장국영의 초대로 모여 즐겁게 즐기다 갔다고 한다. 아니, 영화나 드라마를 오래 찍었으니 막내 스탭진들까지 챙기기는 힘들었을 텐데 장국영은 그런 막내진들까지 이름을 외우고 연락을 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고 하겠다. 대스타 임에도 특별한 대우도 받지 않고 스탭들이 도시락을 먹고 있으면 같이 먹고 수다도 떨고 그러기도 했다. 다만 이러한 부분이 나중에 장국영의 자살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바가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후술. 또한 기자협회에서 만약 장국영이 예쁘지 않았다면 망했을 거라고 언급될 정도로 매우 아름답다. 실제로 장국영은 칸 황금종려상을 받고 자신의 메이크업과 북경어 지도 전담이자 중국의 경극단에서 1급 경극원으로 생활하던 '송소천'에게 바로 전화를 걸어 덕분에 예쁘게 나와서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고마움을 표시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