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국영 (문단 편집) === 아시아의 톱스타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장국영어린시절.jpg|width=100%]]}}}|| || 장국영의 어린 시절, 큰누나 장녹평(張綠萍)과 함께.[* 큰누나 장녹평의 결혼식 당시의 모습이며, 생전 장녹평은 이 사진을 굉장히 아꼈다고 한다.] || '홍콩직물왕' 이라 불리는 부유한 아버지 밑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말론 브란도]], [[알프레드 히치콕]]도 옷감을 주문할 정도의 명성을 자랑했지만 가정을 잘 돌보지 않았고 첩도 있었다. 부모와의 나이차도 컸고 누나와 형들에게 치여 외롭게 자라면서 유모를 친부모보다 더 많이 의지했다고 한다. 유모와는 평생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내성적이고 예민한 성격은 이런 성장환경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영국]]의 [[리즈 대학교]]에서 유학했으나 아버지의 건강악화로[* 술을 마시다가 반신마비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중퇴하고 1976년부터 연예계의 문을 두드렸다. 정식 데뷔는 1977년 참가한 아시아 가요제였다. 로 무려 2위에 오르면서 연예계에 데뷔했다. 홍콩 RTV와 계약한 후 다양한 드라마에 출연하나 대중들에게 임팩트를 주진 못했다. 덕분에 1977, 1978, 1979년 한국 포함 아시아를 두루 다니며 인지도 향상을 꾀했다. 그가 치고 딱히 올라온 계기는 그를 처음 보고 잠재력을 느낀 매니저 진숙분과 의기투합한 이후이며, RTV에서 TVB로 이적하여 연기와 가수 활동 모두 주류로 올라섰다. 실제로 이때 즈음에 장국영은 정말 생각치도 않은 굴욕을 당한 바가 있다. 아직 장국영은 그냥 뜨지 못한 그저그런 무명 연예인이었고, 장국영과 비슷한 또래였고 인기도 훨씬 많았던 '[[진백강]]' 콘서트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노래와 춤을 하였다. 문제는 한창 신이 난 장국영이 자신의 모자를 관객석으로 던진 것이다. 그렇다면 대다수가 싫어하더라도 수많은 관객들 중 한명쯤은 기념으로 가질만 한데 정작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한 명도 그 모자를 갖고 싶어하지 않았으며 바로 무대 위로 모자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 때, 장국영은 다짐을 굳건히 하면서 꼭 성공해야 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1983년, 홍콩 십대 경가금곡 시상식에서 장국영 본인은 스탭진이 알려준 대로 그냥 앞자리에 앉았을 뿐인데 앞자리에서 유일하게 상을 받지 못했던 장국영은 눈물까지 흘리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굴욕들을 발판삼아 그 다음 해부터 장국영은 로 기어이 가수로서 엄청난 성공을 맞게 된다. 또한 '''《백발마녀전》의 주제가 <홍안백발>과 《금지옥엽》의 주제가 <추>'''를 작곡하고 히트시켜 대만 금마장과 홍콩 금상장에서 상을 받기도 했고, 후에도 될 수 있으면 본인이 직접 대부분을 작곡하려고 한단다. 그렇게 장국영은 가수로 먼저 성공한 탓에 중화권에서는 장국영을 가수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워낙 가수로서도 레전드고 배우로는 두 말 하면 입아플 정도. [[가수]]로 성공한 후, 영화배우로서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타게된 건 1986년 [[오우삼]] 감독의 영화 《[[영웅본색]]》과 1987년 정소동 감독의 《[[천녀유혼]]》에 출연하면서였다. 《천녀유혼》에서 [[왕조현]]과 물속에서 [[키스]]를 하던 장면은 홍콩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키스 씬으로 뽑히기도 했다. 장국영이 지금까지도 탑으로 인정받고 있는 이유는 다른 배우들에게 기대서 성공하지 않고 본인이 홍콩 영화의 붐을 이끌었다는 데 기여가 있어서이다. 실제로 다른 스타들보다 일찍 사망한 탓에 실적에서는 밀릴지 모르나 중화권, 그리고 범아시아적으로 장국영 본인이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으로 홍콩 영화를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즐기면서 최고의 인기를 얻게 한 공신이기에 그를 인정하고 그를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쿄 콘서트에서 [[천안문 6.4 항쟁]]에 대해서 중국 정부를 비난하는 한편 [[삼합회]]의 영화계 진출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발언을 한 것이 논란이 되었는데 실제로 원래부터 장국영의 성격은 매우 솔직한 편이었다. 그와 함께 작업했던 전 매니저 진숙분의 말에 따르면, 그는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편이라 많은 오해와 적지 않은 문제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매스컴과도 사이가 안 좋았다. 한 쪽만 적으로 만들어도 위험할 판에 그는 좌충우돌하면서 큰 위기를 맞는다. 때마침 장국영의 콘서트에서 팬 중 하나가 [[알란 탐]]의 팬과 주먹다짐을 하다가 사망한다. 홍콩 언론들은 기다렸다는 듯, 장국영 같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연예인은 연예계를 은퇴해야 한다는 기사들을 쏟아냈다. 자기 편도 하나 없었을 뿐 더러 이미 연예계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던 장국영은[* 언론이 자신을 건드리는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가족과 친구 등을 건드리는 짓에 대해서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1990년 은퇴를 선언한다. 당시 은퇴 콘서트는 비디오로도 나와 있는데 무대를 옮겨 다니면서 사방을 둘러싼 팬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하는 장국영을 볼 수 있다. 본래 장국영은 은퇴 콘서트 후 연예계 자체에서 발을 빼고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조용히 살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매니저인 진숙분은 장국영이 이미 화려한 연예계 생활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캐나다 생활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 보도 자료를 배포할 때 완전 은퇴가 아닌 가수로서만 은퇴하는 내용으로 배포했고 계속 영화 스케쥴을 잡아줬다고 한다. 그녀의 예상대로 장국영은 곧 아무도 자신을 몰라주는 캐나다 생활에 지루함을 느꼈다고 한다. 가수 은퇴 이후, 장국영은 아이돌 태생의 배우라는 한계를 딛고 《아비정전》[* 장국영의 가수 은퇴 발표와 함께 개봉된 영화이다.], 《[[동사서독]]》, 《패왕별희》, 《해피 투게더》 등 당시 홍콩 영화들 중에서도 굵직굵직한 작품들에 출연하여 훌륭한 연기를 선보임으로써 [[아시아]] 전체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된다. 1995년에는 가수로도 복귀하여 《A Thousand Dreams Of You》[* 영화 《풍월》의 주제가. 원곡도 있으나 요새는 검색창에 검색하면 장국영의 노래라고 나온다.], 《추(追)》, 《유심인(有心人)》, 《좌우수(左右手)》, 《아(我)》 등의 히트곡을 내놓는다. 특히 가수로 복귀한 후 발매한 《총애 장국영》 앨범은 우리나라에서도 50만장 이상 팔렸던 엄청난 히트작이었다. 그래서 장국영은 콘서트 투어를 하거나 꼭 크게는 아니더라도 미니 콘서트처럼 한국에서 자신의 콘서트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으나 당시에는 비싼 표를 사서 콘서트를 관람한다는 것에 낯선 한국인들이라 매니저 진숙분은 수익성이 없다며 2000년 열정 투어에서 빼버린다. ~~냉정할세~~ 장국영은 대외적으로는 내성적이고 낯을 가렸지만 함께 일하는 동료나 스태프들에게는 매우 친절하고 매너가 좋은 데다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인격자' 그 자체로 통했다고 한다. [[삼합회]]에 관련된 사람도 많고 각종 괴짜들이 넘쳐나는 홍콩 연예계인데 그런 사람들조차 기를 못 펴고 착하게 굴도록 만들었던 사람이라고. 다만 둘도 없는 절친이었던 [[진백강]][* 진백강 역시 장국영 못지않게 여리여리한 미남이었으며 데뷔도 먼저 했다. 이후 장국영의 인기가 넘사벽이 되다 보니 한국에서의 인지도는 그저 안습하다. 그러나 진백강은 10년 전인 1993년에 약물 과다복용으로 35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과는 데뷔 이후 서로 사이가 틀어져 한 영화에 출연하면서도 촬영 당시 한 컷도 서로 같이 찍지 않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1993년 진백강이 우울증으로 인한 약물 및 알콜 중독으로 고생할 때 화해했다. 이 일화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소개된 적이 있다.[* 이 장면에서 흐르는 피아노 곡은 '추'의 멜로디이다.] 장국영과 진백강은 서로 다양한 작품에서 같이 캐스팅되어 여러가지 이야기를 서로 나누면서 친해졌는데, 문제는 장국영이 뭔 팩폭 할지 항상 두려운 토크쇼(...). 진백강과 장국영이 같이 토크쇼에 나갔을 때, 진백강이 자신의 피부는 타고났기에 관리하지 않고 화장품도 거의 안쓴다고 언급한다. 그러자 장국영이 아니라고, 진백강을 가까이서 보면 화장도 잘하고 매일 피부를 위해 케어를 받는다고 하자 진백강은 굉장히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났다고 한다. 장국영도 별거 아닌데 화를 내는 건 너무하는 거 아니냐. 라고 하면서 서로 절교했다고 한다. 심지어 진백강 주연, 장국영 조연으로 캐스팅되었던 《성탄쾌락》 때는 진백강이 여러가지 조건을 내달았다고 한다. 그 중에서는 "절대 두 사람의 모습을 동시에 잡지 말 것", "같이 찍는 것은 근거리든 원거리든 무조건 안 됨" 등등이 있었다고 한다. 여튼 《성탄쾌락》은 당해 가장 관객이 많이 든 히트작인데 이런 비하인드가 있었다. 1989년에 오리온제과에서 나온 초콜릿 [[https://youtu.be/7sDNeqTNiAQ|'투유' 광고]]에 출연해서 수많은 소녀 팬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었다. 한국에서 투유 초콜릿 광고를 촬영할 때 촬영장을 방문하는 기자들이나 관계자들에게 손수 초콜릿을 나누어 주며 연습한 한국어로 열심히 인사를 하고 일일이 챙겨주고 배려하는 태도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다고. 당시 오리온에서는 초콜릿을 먹고 실제로 본인이 겪은 사랑의 사연을 보내주는 사람들에게 추첨을 통해 장국영의 마지막 콘서트 티켓을 주는 마케팅을 추진했는데 이로 인해 이 초콜릿은 불티나게 팔렸다. 투유 노래는 한국 한정 싱글이었지만 [[표준중국어|보통화]]와 [[광둥어]] 2가지 버전으로 발매됐다. 같은 해에 [[KBS]] 젊음의 행진에 출연해 [[이선희]]와 [[https://www.youtube.com/watch?v=WnG0V7erQ5s|합동 공연을 했고]]([[https://www.youtube.com/watch?v=hbhIZH5mNcc|풀버전 영상]]), 당시 인기 최정상을 달리던 [[쟈니 윤]] 쇼에도 [[https://www.youtube.com/watch?v=knVEElhGSvI|출연했다.]] 사실 유명세를 얻기 이전인 1978년과 1979년에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아시아 각국에서 경쟁적으로 국제가요제를 개최하였는데, 한국의 [[MBC]] 주관 국제가요제에 2년 연속 출전했던 것. [youtube(W9zAGKMStGc)] 79년 <서울 송 페스티벌>은 6월 2일에 개최되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