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녹수 (문단 편집) == 생애 == 장녹수를 두고 《[[연산군일기]]》에서는 본래 [[제안대군]]의 가비(家婢)였다고 썼다. 처음에는 집이 매우 [[가난]]하여 몸을 팔아서 생활하고 [[혼인]]도 여러 번 하였다. 그러다가 제안대군이 부리는 가노(家奴)의 아내가 되어서 아들 하나를 낳고 [[노래]]와 [[춤]]을 배워서 [[창녀|창기]](娼妓)가 되었다. 따라서 [[유부녀]]에 연산군보다 연상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반적인 대중의 생각과 달리 [[외모]]는 평범하여 대단한 [[미인]]은 아니었다. 대신 엄청난 [[동안]]으로 30대에 16세 소녀로 보였으며 연산군이 원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비위를 잘 맞추는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결국 연산군의 최측근이 된 비결은 용모가 아닌 그녀의 언행과 교태였다.[* 이에 대해 연산군에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어머니에 대한 애정 갈구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장녹수와 연산군을 다룬 작품에서는 장녹수가 연산군을 어린아이를 대하듯 달래주거나 연산군이 장녹수에게 어머니처럼 애정을 갈구하는 모습이 많이 나온다.] 연산에게 반말과 조롱, 하대까지 하였으나 이도 장녹수가 연산의 기분을 알고 한 교태였으므로 연산은 화를 내기는커녕 맞춰주며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고 한다. 노래 실력이 출중해서 연산군이 궁중으로 불러 들였다고 한다. >노래를 잘해서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가 맑아서 들을 만하였으며, 나이는 30여 세였는데도 얼굴은 16세의 아이와 같았다.······얼굴은 보통을 넘지 못했으나, 남모르는 교사(巧詐)와 요사스러운 아양은 견줄 사람이 없었다.······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같이 하였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하였다. >---- >《[[연산군일기]]》 연산군 8년 11월 25일 궁중으로 간 장녹수는 애교와 말재주로 연산군의 환심을 받게 되었고 나중에가면 후궁이 되었다. 1503년(연산군 9) 12월 종3품 숙용(淑容)으로 품계가 올랐다. 1504년 3월 연산군은 무명 5백 필을 그녀의 집에 하사하는가 하면 그녀의 집이 여염집 사이에 있어 화재가 나면 위험하다는 이유로 주변의 집을 헐어버리고 새로 지어주었다. 장녹수의 형부인 김효손(金孝孫)은 사정(司正)[* 5위(衛)에 속한 정7품 무관직.]에 제수되었다가 [[함경도]] 전향별감(傳香別監)[* 조선 시대에는 중요한 [[국가]] 의식과 [[제사]]를 거행할 때는 향을 피웠다. 그러나 왕이 지방까지 직접 가서 축문을 읽고 향을 피울 수 없었으므로 대신 제사를 맡는 [[관리]]에게 축문과 향을 전달할 역할이 필요했다. 조선 전기에는 주로 [[환관]]이 맡았고 [[성종(조선)|성종]] 시기부터 주로 충찬위(忠贊尉)와 충의위(忠義衛)가 맡았다.]이 되어서 집안이 크게 부귀영화를 누렸다. 당시 장녹수가 누렸을 권세를 짐작케할수 있는 일화들이 있다. 장녹수가 [[궁녀]] 수근비(水斤非)와 전향(田香)을 참소하여 왕이 죽이라고 명을 내리자 조정에서 반대하는 [[여론]]이 없었다.[* 연산군일기 54권, 연산 10년 6월 9일 무진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ja_11006009_001|#]] ] 그들은 한때 연산군의 승은을 입은 궁녀였지만 장녹수가 그들을 [[질투]]하여 연산군에게 참소하자 머리가 잘려 효수되고 손과 발은 하나씩 잘려 사방에 전시되는 등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 마찬가지로 [[기생]] 옥지화(玉池花)도 장녹수의 [[치마]] 한 번 잘못 밟았다가 참형에 처해졌는데 역시 조정 대신들은 반발없이 그대로 따랐다.[* 연산군일기 60권, 연산 11년 11월 7일 무자 2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ja_11111007_002|#]] ] 1504년, 동지중추부사 이병정이 자신의 노비에게 꾸지람을 한 일을 빌미삼아 그를 감옥에 보냈고, 이병정은 가산을 털어 장녹수에게 뇌물을 바친 후에야 풀려났다. 하지만 이후에도 이병정은 장녹수에게 몇 번이나 더 뇌물을 바쳐야 했다. 1505년 12월에는 장녹수의 치마를 밟았다는 이유로 하급 기생인 운평(運平)에 속하는 옥지화(玉池花)를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취홍원(聚紅院), 뇌영원(蕾英院)에 돌려 보이고, 연방원(聯芳院)에 효시(梟示)하기도 하였다. 1506년 1월에는 내수사의 여종이었던 언니 장복수(張福壽)와 조카들을 면천해 양인(良人)의 신분으로 올렸다. 1506년(중종 1) 결국 중종반정이 일어나 장녹수는 전비, [[숙원 김씨(연산군)|김귀비]] 등과 함께 군기시 앞[* 지금의 [[서울특별시청]] 광장이 있는 지점.]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이 때 분노한 군중들이 그들의 [[성기]]에 기왓장과 돌멩이를 던지면서 "일국의 고혈이 여기에서 탕진됐다"고 외쳤다. 돌무더기가 산을 이뤘다는데 이후에 [[시신]] 처리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슬하에 [[이영수(1502)|이영수]]라는 [[딸]] 1명[* 미디어에서는 장녹수가 연산군의 총애를 독점한 것처럼 비춰지지만 연산군이 정실인 [[폐비 신씨]]에게서 [[요절]]한 자식까지 포함해 총 7명의 자식을 낳았던 것과 대조된다.]이 있었는데 [[왕위]] 계승권이 없는 딸이어서 [[폐세자 이고]]처럼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1518년(중종 13)에도 살아있었고 집, 노비, 약간의 토지를 하사받았다.[* 영수·함금에게 노비 15구와 가사 1좌 전지 15결을 하사하라고 명하다 -《중종실록》 31권, 중종 13년(1518년 명 정덕(正德) 13년) 1월 17일] 그리고 1529년(중종 24)에는 권한에게 은밀히 시집을 간 일이 알려진 것을 보면 이 때도 생존해있던 것으로 보인다.[* (전략) "권한은 서자(庶子)로서 분수를 모르고 장 숙원(張淑媛)의 딸 【폐주(廢主)의 숙원 녹주(綠珠)가 폐주에게 굄을 받아 낳은 딸이다.】 에게 은밀히 장가들었으니 지극히 놀라운 일로, 본사(本司)가 추문하다가 형장 추문하기를 청하였습니다. (후략)- 《중종 24년(1529년) 6월 1일 갑자 2번째기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