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당전쟁 (문단 편집) == 전개 == 1929년 9월, [[장파쿠이]]가 [[계계군벌]]의 잔여세력을 규합하여 [[2차 장계전쟁]]이 일으키자 국민정부는 안휘의 [[스여우싼]]에게 광동 방위를 지시하고 정저우의 [[탕성즈]]에게는 호남으로 들어가 장파쿠이의 배후를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허나 스여우싼은 12월 2일 호당구국군 제5로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반란에 합류하였고 난징 공격을 준비했다. [[2차 장풍전쟁]]에서 펑위샹 군대를 진압했던 탕성즈도 [[12월 5일]] 호당구국군 제4로 총사령관에 취임함으로 스여우싼에게 호응했다. 또한 탕성즈는 옹왕연장을 주장하며 왕징웨이를 옹립하고 장파쿠이와 연대할 것을 선언했다. 이에 장제스는 기자회견을 통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발표했다. >"스여우싼 부대의 변절과 탕성즈의 반역 가담은 나에게는 전혀 뜻밖이다. 나는 남과는 성의를 가지고 사귀며 탕성즈 등에게도 거리낌 없이 대했다. 전에 누구에게서 탕성즈는 신의가 부족해 언젠가 반드시 반란을 일으킬 터이니 중용하지 않도록 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전혀 의심하지 않고 계속하여 그에게 혁명의 정도를 걷게 하려 했다. 그것이 지금 이렇게 되고 보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런 일은 흔히 있을 수 있다고 본다. 혁명이 진행될 때, 어차피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과정인 것이다. 혁명이 바야흐로 성공에 다다랐을 때, 가짜 혁명가나 반혁명가는 이렇게 하여 스스로 도태되어 가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들의 반란을 비관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낙관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당과 국가가 맡겨준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어찌 그들 때문에 동요하는 일이 있겠는가." 12월 7일 국민정부는 탕성즈 면직과 체포령을 내렸고 장제스는 12월 9일 전국의 장병들에게 보내는 전문을 띄웠다. ||혁명정부는 한두명 무인의 반란으로 인해 동요하지는 않는다. 혁명정부는 위급존망의 때에 즈음하여 더욱더 강력한 혁명정신을 가지고 분투하여 반역을 숙청하고 규율을 바로잡아야만 비로소 그 사명을 달성할 수 있다. [[천중밍]]이 [[영풍함 사건|반란했을 때]] 우리에게는 단 한척인 [[중산함]]이 있었을 뿐이다. 이에 비하면 오늘의 혁명환경은 훨씬 좋아져 있고, 혁명세력의 흥륭은 그 당시와 비할 바가 아니다. 나는 반역을 근절할 결의뿐만 아니라, 반역을 근절할 깊은 자신을 가지고 있다. 우리 장병이 시비와 정역을 똑똑히 확인하고, 근거 없는 소문에 현혹되지 말길 바란다.|| 12월 20일, [[옌시산]]과 [[장쉐량]]이 중앙옹호의 통전을 띄웠다. 옌시산과 장쉐량이 장제스의 편을 선 것을 보고 당황한 스여우싼은 반장을 중단하고 다시 장제스에게 귀순했고 장제스는 옌시산과 장쉐량에게 탕성즈 토벌령을 하달했다. 옌시산은 즉각 병력을 출격시켰으나 장쉐량은 보경안민을 구실로 이번에도 출병하지 않았다. 12월, 중앙군과 산서군이 남북으로 탕성즈에 대한 협공을 실시했다. 당시 12월 초부터 수십년만의 대설이 내리고 있었고 1미터가 넘는 눈이 쌓여 탕성즈 군대는 보급이 끊기고 추위에 약한 호남 출신이 대부분이라 동상자가 속출하는 등 전투력을 급격히 상실했다. 1930년 1월 2일, 중앙군이 주마점을 공격하자 굶주림과 추위에 지친 탕성즈 군대는 붕괴되었다. 1월 13일, 1만 6천명의 탕성즈 군대가 싸우지도 않고 투항했고 1만 3천정의 소총과 100문의 대포가 노획되었다. 1월 14일 눈이 그치자 탕성즈는 변장하고 카이펑을 거쳐 톈진의 일본 조계지로 도주했고 다시 [[영국령 홍콩]]으로 망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