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덕수 (문단 편집) == 기타 == * 상하이 시절 [[룸메이트]]가 바로 독립운동가 [[김홍일(군인)|김홍일]] [[중장]]이다. * 부인 박은혜는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사 및 기숙사 사감,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장, [[은석초등학교(서울)|은석초등학교]] 초대 교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이다. 2남 2녀를 두었다. * 1920년대 ~ 1930년대 [[미국]] 유학 시절에 [[김활란]]한테 청혼했다가 차였다고 한다(...). ~~그리고 둘 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락했다.~~ 박은혜를 장덕수에게 소개해 준 사람도 [[김활란]]이다. * [[미군정]]이 수사하여 밝힌 사실에 의하면 암살 명단에는 고하 [[송진우(독립운동가)|송진우]]를 비롯하여 장덕수는 물론 낭산 [[김준연]](金俊淵), [[윤치영]] 등 포함하여 27명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한국민주당]]이거나 그와 관련이 깊은 인사들이었으며 이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그럼에도 만약 [[김구]]를 체포한다면 거족적으로 군정에 대항하겠다고 [[존 리드 하지|하지]]에게 선언했다. 이 일로 한민당은 김구를 두둔하는 이승만에게도 석연찮은 눈으로 보게되었다.[* “反共 · 建國 에 寧日없던 나날 , 李承晩 , 光復主役 들의 8·15前後<特輯>”, 《新東亞》, (東亞日報社) , 1977년 8월, p. 108-114] * 장덕수를 습격한 박광옥은 [[김성수(1891)|인촌]]의 집에서 일한 가사 도우미의 아들이었다. 김성수가 [[조병옥]]에게 추천해 경찰에 임용됐다. 1948년 3월 15일, 오전에 열린 [[장덕수]] 피살 사건 공판에서 [[김구]]의 증인 신문 때에 법무장교와 김구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자, 암살범인 박광옥은 피고석에서 김구 선생을 모욕한다고 고함을 지르며 혁대를 풀어들고 횡포를 벌여 미군 헌병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 許政, 《내일을 위한 證言 : 許政回顧錄》, 1979, 샘터사, p. 14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