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락궁 (문단 편집) === 고려 === 고려 초엔 [[태조(고려)|태조 왕건]]이 고구려의 옛 수도를 존중하자는 의미로 크게 우대했으며 이후 군주들은 분사(分司), 나누어진(분) 정부기관(사)을 설치했으며 자주 행차하였다. 제3대 [[정종(고려 3대)|정종]]은 서경으로 완전히 천도를 시도했다. 제4대 [[광종(고려)|광종]]은 서경을 서도(西都)로 개칭했다. 이후 서도는 서경의 대표적 별칭이 된다. 제 6대 [[성종(고려)|성종]]은 서경을 웅도(雄都, 웅장한 도읍,도시)라고 칭한 뒤 직접 행차해 정무를 보고 조카 왕송(나중의 [[목종(고려)|목종]])을 개령군으로 봉해 자신의 후계자로 공인했다. 제7대 목종은 서경을 [[호경]](鎬京)으로 개칭했다. 이후 호경은 서경의 별칭 중 하나가 된다. 고려사에 따르면 목종은 거의 매년마다 호경에 행차했다. 1012년, [[현종(고려)|현종]]은 서경에 개경 본궐처럼 황성(皇城)을 둘러 황성 > 궁성으로 이루어진 천자식 궁궐을 완성한다. 1014년에 [[김훈·최질의 난]]이 일어나 현종은 정권을 빼앗긴다. [[김훈·최질의 난]]은 [[강조의 정변]] 이후 일어난 두번째 무신의 난으로 후에 일어날 [[무신정변]]과 그 성격이 비슷하다. 1015년 현종은 서경에 행차해 장락궁에서 연회를 열고 그들을 크게 우대했다. [[김훈(고려)|김훈]], [[최질]] 일당이 취해 경계를 풀자 [[왕가도]]를 시켜 모두 체포해 총 19명을 주살했다. 고려사 기록엔 현종, [[선종(고려)|선종]], [[정종(고려 10대)|정종]], 숙종, 예종이 자주 행차했다. 특히 정종, 숙종, 의종은 용선(龍船)을 타고 대동강을 내려와 아주 화려하게 장락궁으로 갔다고 한다. [[숙종(고려)|숙종]], [[예종(고려)|예종]]은 자신의 왕권 확장 및 [[고려의 여진 정벌|여진 정벌]]을 위해 자주 행차했다. 숙종은 붕어 전 마지막까지 서경 장락궁에 있다가 개경으로 돌아오던 중 사망했다. 예종은 이 곳에서 [[윤관]]의 여진정벌 성과를 보고 받고 성을 추가로 짓게 했다. [[인종(고려)|인종]]은 서경 세력을 육성하기 위해 장락궁에 힘을 쏟았고 아들 의종은 반란을 피하기 위해 장락궁을 찾았다. [[묘청의 난]]이 터지면서 서경 나성, 황성, 궁성은 반란군의 거점지가 된다. 진압군의 수장인 [[김부식]]이 표현한 서경의 성곽은 북쪽엔 산으로 둘러 쌓였고 동서남쪽은 대동강으로 둘러 쌓였다고 했다. [[1233년]], 고종 재위 20년 차에 [[여몽전쟁]]이 벌어졌고 서경이 폐허가 됐다고 한다. 장락궁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만 서경의 중심지에 있던 궁궐로서 전란을 피해가진 못했을 것이다. [[원종(고려)|원종]] 재위 2년째인 [[1261년]]에 당시 [[충렬왕|태자]]가 서경에 행차했는데 대동강에서 [[흑룡]]이 보였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