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락궁 (문단 편집) === [[황성#s-2|황성(皇城)]] / [[평양성]](?) === [include(틀:고구려의 도성 및 궁궐)] 고구려, 고려 시대까지 있었던 [[평양성|장안성]]이 원조라고 생각된다. 평양성은 나성일 수도 있다. 고려사에 등장하는 장락궁의 문 중에 장안성의 문 이름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현종 재위 2년(1011년) 8월에 쌓았으며 서경 궁성이 개경 본궐과 같은 위치에 있다는 의미이다. 별궁 [[대화궁]], [[구제궁]], [[용덕궁]]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영명사]] 등 고구려 때부터 내려오는 오래된 여러 사찰이 있었다. 고려사 김부식 열전엔 평양성으로 추정되는 성의 문 이름이 나온다. * 다경루(多景樓) 고려 혹 고구려 시절의 옛 성터에 세웠다는 누각. 뜻은 "많고 크다"이며 예종이 이름을 지었다. 의종은 이 곳에서 연회를 연 뒤 신하들에게 [[백금]]을 하사했다고 한다. * [[을밀대]](乙密臺) 문서 참조. 금수산(錦繡山) 꼭대기에 있었다고 하며 이 밑에 영명사, [[구제궁]], 기린굴, 조천석이 있었다고 한다. * [[부벽루]](浮碧樓) 문서 참조. 의종이 폐위 당하기 2년 전 이 곳에서 별무반 중 하나인 신기군의 말타기와 물놀이를 관람했다. * 용서정(籠瑞亭) 패강(대동강)에 있던 큰 정자로 의종이 폐위 당하기 1년 전 여기서 연회를 열었다. * 동명사(東明祠) 고려사 기록엔 성 동남쪽 용산(龍山) 지역에 위치했다고 한다. 동명성제사(東明聖帝祠), 동명왕묘(東明王廟)라고도 했다. 고려시대 민간에선 진주묘(眞珠墓)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름을 보면 알다시피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을 모신 사당이다. 고려사 지 기록엔 고려는 늘 시절에 맞춰 어압(御押)을 보냈다. 어압은 임금(어)이 직접 쓴 문서(압)로 정확하게는 임금의 옥새가 찍힌 문서를 이르는데 이 어압을 보내 매달 보름마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민간에서도 자주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 통한교(通漢橋) 대동강에 있던 대교. 숙종이 당시 왕태자였던 예종을 시켜 다리를 순시하고 오게 했다. 다리의 뜻은 "거대함을 통하는 다리." 매우 오래된 다리인 듯 한데 고려시대 민간엔 '시조 동명성왕이 통한교를 건너 [[구제궁]]에 가 조천석을 밟고 승천했다.'란 전설이 있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