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량(전한) (문단 편집) === 여후의 부탁 === ||[[파일:zoSIUPG.jpg]]|| || '''네 명의 노인이 태자를 보필하다''' || 유방이 관중으로 들어가자, 장량도 이를 따라갔다. 하지만 본래 건강이 극도로 좋지 않았던 장량은 양생법(養生法)을 쓰면서 밥도 거의 먹지 않고 집 밖으로도 나서는 일이 드물었다. 이 무렵 유방은 척(戚)부인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는 문제로 [[여후]](呂后)와 갈등을 벌이고 있었다. 태자를 폐하고 새로 다시 임명하는 일이라, 대부분의 공신들은 비판적이었지만 유방의 결심이 너무 확고해서 아무도 함부로 말을 못하고 있었고, 이에 애가 탄 여후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두려워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치트키|폐하는 유후의 말은 무조건 들어줍니다]] 하자 여후는 오빠인 건성후(建成侯) 여택(呂澤)[* 사실, 여택의 작위는 주여후(周呂侯)고 건성후는 여택의 동생으로 여후의 작은오빠인 여석지(呂釋之)의 작위다. 이 때문에 여기서 나온 여택은 여석지를 잘못 쓴 게 아닌가 하기도 한다.]을 장량에게 보내 계책을 물어보았다. 처음에 장량은 "황실 가족의 일인데, 나 같은 사람 백 명이 있다 해도 폐하가 무슨 말을 들으시겠나?" 같은 반응을 보였지만, 마음이 급해진 여택이 장량을 위협하며 뭐든 방법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자 --나이가 들어서 소싯적만 한 깡은 없었는지-- 유방이 그토록 초빙하려고 했지만 초빙하지 못한 상산사호(商山四皓)라는 인물들을 초빙하여 태자 옆에 있게 하면 황제를 놀라게 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여담으로 여후가 죽자마자 공신들도 이때의 여택처럼 여씨와 친했던 역상을 협박, 그의 아들인 역기를 조종해 여산을 속여 군권을 빼앗은 뒤 몰살시킨다. --하나를 보면 둘을 배우는 공신들--] 여후는 즉시 많은 재물을 써가며 그들을 초빙했고, 훗날 경포의 반란을 진압하고 태자를 바꿀 생각을 하고 있던 유방은, 그들까지 여후가 초빙한 모습을 보자 "'''이제는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라고 하며 울면서 태자를 바꾸는 일을 그만두었다. 다만 상산사호와 관련된 이야기는 [[사기(역사책)|사기]]에 일종의 야사처럼 서술된 이야기이고 [[자치통감]]에서는 "그 성깔의 유방이 고작 선비 몇 명 불렀다고 깨갱할 리가 없다" 며 상산사호 설의 신빙성을 부정했으며, 유방이 유영을 폐태자하지 않으려 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당시 조정 전체가 여후와 유영에게 우호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현대의 관점에서야 여후가 악녀지만 폐태자 당시 여후는 초한쟁패에서 오랫동안 항우의 밑에서 포로 생활을 한 것에 대해 동정적 여론이 강했으며, 멀쩡하게 정통성을 가진 후계자를 유약하다는 이유만으로 폐태자에 찬성할 공신은 없었으니 처음부터 유영이 폐태자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리고 어차피 여의는 혜제보다도 더 어렸기 때문에 유약함으로 따지면 여의가 더했다. 거기에 혜제는 당시 시점에서는 외척이 배경이 될 수 있지만 여의는 그런 것도 없었다.] 그러나 후술할 여후와 장량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상산사호 설의 신빙성은 차치하더라도 장량이 여후의 편(이라기보다는 혜제의 편)을 들었던 것은 확실하며, 장량을 비롯한 공신들의 폐태자 반대가 최종적으로 유방의 결정에 관여했다는 것까지는 추측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