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량(전한) (문단 편집) === 말년 === 장량은 대(代) 땅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출정한 황제를 따라 종군하다가 마읍(馬邑)에서 기이한 계책을 내거나, 한신의 반란을 진압한 소하를 상국에 추천하기도 했다. 그 무렵에 장량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한나라의 재상을 지냈고, 이윽고 진나라에 의해 한나라가 멸망하자, 만금의 재산을 아까워하지 않고 한나라를 위해 강포한 진나라에 원수를 갚으려고 하다가 천하를 진동시켰다. >오늘 이 세 치 혀로 황제의 스승이 되고 만호의 봉읍을 받았으며, 그 지위는 열후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포의로 시작한 사람으로는 지극히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이라 나는 이것을 매우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이제는 인간 세상의 일을 모두 잊어버리고 적송자(赤松子)[* 전한시대의 신선. 사마광은 적송자 드립은 황당한 이야기고, 다만 장량이 처신을 잘하려고 지어낸 이야기라고 평가했다. 여담으로 [[이순신]]이 무과 시험을 볼 때, "장량이 적송자를 따라 가서 놀았다는데, 그럼 장량은 죽지 않았나?"라는 문제에 "안 죽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리고 강목에 보니 장량이 죽었다고 쓰여있던데?" 라고 답변하였다.]의 뒤를 따라가 노닐고자 한다. 이 '적송자' 언급 때문에 장량이 제때 물러나서 [[토사구팽|숙청을 피했다]]는 등의 말이 많은데, 유방은 장량을 숙청할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았고, 장량도 물러나거나 속세를 떠나기는커녕 계속 장안에 남아서 지속적으로 정치적 조언을 했다. 심지어 대외적으로 은퇴한 혜제 시기에도 아들 장벽강을 통해 막후에서 조정을 움직였다는 의혹도 있다. 다만 폐태자 문제로 여후의 편을 든 것이 크게 섭섭했는지는 몰라도 [[영포]]의 반란 때 장량이 출병하는 유방을 아픈 몸으로 배웅하면서 초나라의 정병들은 매서우니 앞서 싸우지 말라고 말했으나, 유방은 장량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사실 영포는 워낙 거물급 반역자라서 여후도 울면서 혜제 대신 당신이 나서야 한다고 졸랐을 정도였던 만큼 군사들의 사기를 유지하려면 아무래도 유방이 나서서 지휘하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결국 유방은 앞장서 싸우다가 영포군의 화살에 맞은 상처가 덧나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때 장량은 밥도 거의 먹지 않으면서 몸을 가볍게 유지하고 있었는데, 곧 유방이 세상을 뜨자 태자의 일을 고마워한 여후는 '''억지로 음식을 먹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 번 살다 가는 인생이란 날랜 백마가 지나가는 것을 문틈으로 보듯 쏜 살 같은 것(人生一世間, 如白駒過隙)입니다. 그런데 어찌 그렇게 고통스럽게 살기를 바라십니까? 이에 장량은 별 수 없이 억지로 음식을 먹게 되었으며, 그 뒤로 8년 뒤에 죽었다. 몸이 약해 골골대긴 했지만 소하나 [[조참]] 등이 죽고 난 후에도 살아 있었다. 덧없이 빠른 세월을 뜻하는 백구과극(白駒過隙)이라는 사자성어는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장량이 다리 밑에서 노인과 만난 13년 만에, 그 노인이 말했던 곡성산(穀城山)을 가보자 그 밑에서 황석(黃石)을 하나 발견했고, 이후에 이 황석을 자신의 스승인 황석공으로 여겨 집으로 가져와 보물처럼 여기며 제사까지 지내주었다. 장량의 후손들은 장량이 죽자 그 황석을 장량과 같이 묻어 주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