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막(삼국지) (문단 편집) == 생애 == 젊은 시절부터 [[조조]], [[원소(삼국지)|원소]]와 친구[* 그러나 아시다시피 이 3명의 친구는 나중에 서로가 서로에게 무기를 겨누는 숙적이 된다. 원소랑 장막은 동탁 토벌 전부터 적이였으며, 장막하고 조조는 서주 대학살 이후로 장막이 뒤통수를 거하게 친다. 조조랑 원소는 [[관도대전|뭐 말할 필요도 없다.]]]였으며 청류파의 일원이자 명사로 손꼽혀 공부(公府)에 들어가 기도위를 역임하다가 진류 태수가 된 인물이다. 의협심이 강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에 몸을 아끼지 않아 팔주(八廚)의 일원으로 꼽혔다. [[동탁]]이 [[한나라]]를 장악하자 조조, 원소와 함께 반 동탁 의용군을 결성하였으나, 동탁에게 패하여 조조와 함께 [[연주(중국)|연주]]로 물러났다. 이때 거의 밑바닥으로 떨어진 조조가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장막의 도움이 크다. 처음에는 조조의 후원자였으나 조조가 점차 세력을 키우자 반쯤은 조조의 산하로 흡수된 듯하다. 한때 원소는 장막을 친형처럼 따랐다고 하지만, 장막은 맹주 시절 원소의 독선적이고 교만한 태도를 정론으로 질책했기 때문에 원소와의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 훗날 원소에게서 도망친 [[한복(삼국지)#s-1|한복]]을 보호해서 원소와 장막의 관계는 더욱 틀어진다. 원소는 조조에게 장막을 제거하라고 했으나 조조는 "친구끼리 죽이려 한다."고 오히려 원소를 책망했고, 이 사실을 안 장막은 조조를 더욱 두텁게 대했다. 조조 역시 [[도겸(삼국지)|도겸]]과 싸울 때 일족들에게 자신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는 경우에는 장막에게 의탁하라는 말을 남겼으며 조조가 돌아와 재회하자 서로 눈물을 흘리며 대했다고 할 정도였다. 이후 원소의 숙청을 피해 달아난 [[여포]]를 보호했는데 이를 들은 원소는 크게 진노하며 장막에게 한을 품었다고 한다. 장막은 조조가 결국은 원소에게 굴복해 자신을 해치울 것으로 생각하여 불안해 했다.[* 즉, 장막은 원소에게 찍힐 일들만 골라 한 것이다. 사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게 조조의 시작은 친원소 군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원소의 부하 수준이었으며 위기 때마다 원소의 도움을 받은 적이 많았기에 어떤 식으로든 원소와 얽혀 있을 수밖에 없었으며 조조는 자신에게 쓸모없거나 당장은 쓸모있어도 나중에 필요 없어지면 트집잡아 죽였던 데다 훗날 원소가 관도대전에서 패배하긴 했어도 원소의 세력은 조조보다 한참 우위에 있었을 정도라 만약 조조가 원소에게 잘보이기 위해 혹은 원소와 화해 한답시고 장막을 죽이거나 원소에게 보내버릴지도 모를 일이었기에 장막 입장에서는 충분히 불안할 법했다.][* 다만 최종적으로는 조조가 원소를 이겼고 조조가 원소에게 화해의 표시로 장막을 보낸다고 해도 일족 전체를 원소에게 보낼 가능성은 낮으니 가만히만 있었으면 일족은 멸족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조조의 경우는 자신이 죽으면 가족들더러 장막에게 의지하라 할 정도로 장막을 친구로서 믿고 신뢰했지만, 장막의 배신이 조조를 친족 위주로 세력을 꾸미게 만든 원인이 됐으니 장막의 배신 이전과 이후가 조조의 통치방식을 갈라버리는 경계선이 된 셈이다. 오히려 가장 신뢰하는 친구였던 장막의 배신을 경험하지 않은 조조는 장막을 원소에게 보내지 않고, 다른 것으로 타협 보는 선택지를 할 수도 있었다.] 조조가 다시 도겸을 공격하자(194년) 장막의 동생 [[장초(삼국지)|장초]]와 [[진궁]] 등이 접근하여 여포를 자신의 검으로서 끌여들여 반란을 일으킬 것을 권한다.[* 정확히는 일단 여포가 어쨌든 싸움은 잘하니 형식상 연주목으로 추대한 후 조조를 물리치고 나면 그에게 어느 정도 지분을 줘서 떼어낸 후에 연주를 바탕으로 패업을 도모하자는 의미다.] 장막의 높은 명성은 서주 대학살과 같은 조조의 난폭함과 잔인함에 대한 불만에 힘입어 연주 전역이 호응하게 했고 이로 인해 조조는 멸망 직전의 위기까지 몰린다. 그러나 연주를 거의 모두 장악하였음에도 [[순욱]]을 중심으로 정욱 등 조조의 충신들이 기어코 몇개의 성을 보존하여 장막은 연주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 실패했고, 조조가 이끄는 본대의 귀환으로 전세가 장기화된다. 처음엔 여포군이 조조를 거듭 거세게 공격하여 몰아세웠으나, 그해 메뚜기떼가 극성을 부려 군량이 부족해 졌으므로 결국 결정타를 가하지 못한 채로 군사를 물리어 두 군세가 대치한 채로 싸움은 장기전이 되었다. 그러다 이듬해부터는 점차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정도 근처에서 여포군을 대파한 이후부터는 전세가 역전되어 빼앗겼던 성들을 대부분 수복한다. 장막이 바지사장으로 내세웠던 여포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장막을 버리고 달아나 서주의 [[유비]]에게 의탁한다. 이에 장막은 여포를 뒤따라 서주로 향하는 한편, 동생 장초에게 일족들을 맡기고 옹구를 지키게 했으며, 자신은 직접 [[원술]]에게 지원군을 요청하러 떠났으나 수춘에 도착하기 전에 부하들의 배신으로 살해당한다.[* 가끔 장막의 행동을 이해해 장막을 옹호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고대 중국 학자들이 조조의 악행을 비판할 때 장막의 일족을 멸족한걸로 까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고대 관점으로 보았을 때 장막의 멸족은 동정심을 갖기는 커녕 자업자득에 가깝다고 평가될 수 있다.] 장초는 조조에게 포위되어 수개월 동안 항전했지만 결국 성이 함락되자 자살했다. 조조에 의해 장막, 장초의 일가는 삼족이 멸해졌으며, 조조는 연주를 평정한 뒤에 반란군에 가담한 연주 호족들을 숙청했는데 이때 연주 호족인 [[변양]]은 그의 향인들에게 모함을 당해 죽임을 당했다. 한편 여포와 진궁은 의탁을 받아들인 유비와 크게 다투면서 서주를 점령하고 유비를 몰아내나 유비는 곧바로 조조한테 갔고 조조는 서주를 침공해서 점령한 다음에 여포와 진궁을 교수형에 처하고 효수를 했으며, 결국에는 장막, 장초, 변양, 여포, 진궁 모두 조조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