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문석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1997년 [[LG 트윈스]]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하며 상당한 기대를 모았으나, 기대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였다. 데뷔시즌이던 1997시즌 7경기 2패에 방어율 13.50에 그쳤고, 5월 4일에는 대구에서 열린 삼성과의 경기에서 선발등판하여 5:27이라는 역대 최악의 대패의 원흉이 되기도 했다. 1998년에는 부상으로 인한 재활로 출장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99년 6월 28일 해태와의 홈경기에서 선발등판해 5이닝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데뷔 첫 승리를 기록하더니 7월 26일 사직 롯데전에서 데뷔 첫 완봉승[* 이 경기 승리로 LG는 롯데와의 사직 4연전을 싹쓸이했다.]에 성공하며 무너진 LG 마운드의 난세영웅이 되기도 했다. 선발과 구원을 가리지 않고 스윙맨으로 나오며 4승3패4세이브에 방어율 4.21로 입단 3년만에 드디어 1군 무대에서 제 몫을 했다. 2000년에는 두산과 LG의 플레이오프 6차전에 등판해서 [[김용수]]가 다 이겨놓은 9회초 2아웃에서 동점홈런, 연장전에서는 역전 홈런을 맞아 한국시리즈 진출을 놓치기도 했다. 두산과의 플레이오프에서 역전패를 허용한 임팩트가 워낙 커서 2000년에 부진한 것으로 기억하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 장문석은 정규시즌에는 상당히 잘 했다. 2000년은 6연승에 잠시나마 탈삼진 1위도 해보기도 했고, ERA는 3.42로 리그 6위인데 이는 우승팀 현대의 주축투수였던 [[정민태]], [[김수경(야구)|김수경]]보다도 높은 호성적이었다. 심화지표로는 스탯티즈 기준 ERA+ 130.9(선수 시절 2위), FIP+ 130.7(3위)에 WAR은 3.42를 기록하면서 커리어 하이로 여겨지는 2002년보다 높다.[* 그 해 성적은 40경기 등판, 137이닝 9승 8패 11세이브를 기록했다.] 이 성적은 00시즌 LG에서 [[데니 해리거]] 다음 가는 성적으로, LG의 토종 에이스 역할을 했대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못한 것이 이미지로 굳어버렸을 뿐. 2000시즌 장문석은 선발과 불펜을 오가는 보직이동[* 마무리로 시작해 5월 선발이 되었다가 8월 다시 마무리로 전업했다.]과 마구잡이식 등판으로 인해 후반기에는 거의 퍼져버린 상태였다. 플레이오프에서 탈락의 원흉이 된 데는 2차전에서는 [[김동주(타자)|김동주]]에게 강습타구를 맞았고, 5차전에서는 [[심정수]]에게 역전 홈런을 맞는 등 부진했음에도 불구, 그것을 감안하지 않고 올려버린 [[이광은]] 감독의 책임이 크다. 더불어 페넌트레이스 때 이상하게 투수운용을 해서[* 마무리를 5번이나 바꿨다. 선발요원이었던 [[최향남]], 장문석, [[이승호(1976)|이승호]], [[경헌호]] 등이 마무리를 돌아가면서 하고 원래 마무리였던 [[김용수]]는 마무리-선발-계투 순으로 전환시키는 식으로... 이해 LG의 국내 투수 선발등판은 김용수의 18회가 최다로, 해리거를 빼고는 붙박이 선발이 없다시피 한 수준이었다.] 장문석이 퍼지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 것까지... 아무튼 이 때 이광은 감독이 장문석을 혹사시키는 바람에 그 여파는 2001년까지 이어져 ERA 7.74를 기록하는 등 크게 부진했다. 그러다가 [[2002년]] 다시 각성, [[이동현(1983)|이동현]], [[이상훈(좌완투수)|이상훈]]과 함께 든든한 승리조가 되어 LG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크게 일조했다. 이 때의 기록은 전천후 투수로 등판, 무려 10승 3패 4세이브 9홀드 [[평균자책점]] '''1.60'''. 참고로 이 사람, 59경기에서 100이닝 넘게 소화했다. [[이동현(1983)|이동현]]과 [[신윤호(1975)|신윤호]]에 비해서 해당 선수가 묻혀서 그렇지 원조 [[살려조]]라고 봐조 무방한 수준. 이후 2003년에도 전천후로 나와 39경기 100이닝을 소화했다. 전반기 불펜으로는 부진했으나 시즌 중반 전격 선발 전환후 7승을 기록하며 총 9승을 거뒀다. 2004년에는 선발투수로 주로 나와 150이닝 동안 10승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롯데 자이언츠/2005년/5월/26일|526 대첩]] 항목과 아래 [[흑역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 번에 와르르 무너지는 경향이 매우 강했고, 또한 김성근 재임 시절 혹사의 여파인지, 부상에 줄곧 시달리기도 했다. 장문석의 이미지가 이도저도 아닌 이미지로 굳어진 것은 이광은 - 김성근 - 이광환 세 감독이 계속해서 혹사시키는 바람에 퍼져서 생긴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2005 시즌이 끝난 후 손상정, [[한규식]]과 함께 [[마해영]], [[서동욱]], [[최상덕]]을 상대로 [[KIA 타이거즈]]에 [[트레이드]]되었다.[* 양 팀 모두 폐품정리 트레이드였다고 봐도 무방했다. 마해영은 기아에서 서정환 감독과 원수도 지고 하락세를 탔으며, 최상덕 역시 2004년을 기점으로 노쇠화로 무너졌다. 둘 다 LG에서 퇴물취급 받고서 2시즌도 안 돼서 방출되었다. 그나마 서동욱이 LG에서 오래 뛰었지만, 넥센으로 갔고 10년만에 친정팀으로 가서 포텐셜이 뒤 늦게 터진 노망주가 되었다.][* 장문석과 묶여서 온 두 선수들도 다를 바가 없었다. 저 중에서 가장 오래 뛴 사람이 장문석.] 여담으로 장문석은 KIA로 트레이드될 당시 자신의 친정팀인 LG를 대놓고 디스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팀을 위해 뼈빠지게 던졌는데 돌아오는 것은 토사구팽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때부터 부상과 자기관리 실패로[* LG 시절 전천후로 나와 혹사당한 탓에 피로가 누적되어 부상이 찾아온 영향도 있었으나 LG 시절 사진과 KIA 시절 은퇴하기 직전의 사진을 비교해 보면 체중이 상당히 증가했다는게 눈에 보일 정도로 자기관리에 소홀한 편이었다.] 인해 본격적인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KIA 이적 후 첫 시즌인 2006년에는 마무리 투수로 나와 1승 3패 15세이브를 기록하여 겉으로는 괜찮은 성적을 냈으나, 후반기부터 맞아나가기 시작하며 마무리 자리를 [[윤석민(투수)|윤석민]]에게 내준다. 이후 다시는 부활하지 못하면서 2007년과 2009년에는 1군 경기 출전 기록이 없고, [[2008년]]에는 밑의 통산 기록에서 보다시피 승패 없이 패전처리조 격으로만 나와 승, 패, 세이브, 홀드 중 아무것도 기록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김진우(1983)|김진우]]에게 [[노장진]]을 소개시켜 나쁜 물을 들였다고 KIA팬들에게 이미지도 안 좋다. 김진우의 해명에는 한두 번 만난 게 다였다곤 하지만. 결국 2009 시즌 후 KIA에서 방출당했다. [[2009년 한국시리즈]] 이후 선수단 정리 과정에서 방출당한 것. 이후 자신의 스승인 [[김성근]] 감독 밑으로 들어와 재기하기 위해 SK 이적을 시도하였으나, 무릎 부상이 재발해 결국 은퇴하고 말았다. 부상 문제와는 별개로, KIA 시절인 [[2006년]] [[5월 9일]] 문학 SK전에서 장문석은 SK의 외국인 타자였던 [[시오타니 가즈히코]]를 맞췄는데, 시즌 초 SK의 주전 [[3루수]]로 타선에서 맹타를 휘두르던 시오타니는 이 때 손가락 골절상을 당하며 방출당했고, 시즌 후 그대로 선수 경력을 접고 말았다. 팀 역시 용병의 갑작스런 전력 이탈로 전체적으로 일정이 꼬이면서 6위로 시즌을 마감했고, [[조범현]] 감독도 물러났다. 그런 장본인을 영입하려는 데 대한 SK 팬들의 여론은 매우 좋지 않았다. 은퇴 후 모교인 [[부경고등학교 야구부|부경고등학교]](경남상고에서 바뀜)의 코치를 지냈고, 이후 감독을 맡기도 했으나 오래 가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