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봉한 (문단 편집) == 생애 == 장봉한은 1879년경 함경북도 종성군 종성면 주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9년 무렵 연해주에서 [[이범윤]]과 [[최재형(독립운동가)|최재형]] 휘하에 들어갔고 추풍 달자동에서 800명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제에 대항했다. 이후 1919년 8월 [[홍범도]]의 부대와 합세한 그는 5백여 명의 독립군을 이끌고 9월 중순경 하마탕으로 전진, 백초구를 습격하려 했다. 그러나 정이단(正義團)이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만류하자 대감자(大坎子)로 철수했고, 같은 해 10월에는 왕청현 춘방사 대동에서 군자금 1800원을 모금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 이 시기 정의단을 이끌며 대감자에 함께 거주하던 [[서일]]과 긴밀한 협조를 취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4월, 러시아 연해주에서 [[이범윤]], [[이동휘]], 진학신(秦學新) 등이 혼춘현(琿春縣) 탑도구(塔道溝)로 이동하여 국민의회(國民議會)의 지부를 설치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장봉한은 여기에 참가했고, 1920년 1월 초에는 회보(會報)를 발행하기 위해 등사판 2벌을 매입하여 동 지부의 서기 김덕한(金德漢)과 함께 잡지 발행 책임자로 선임되기도 했다. 또한 북간도 일대에서 가장 큰 무장항일단체인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핵심인물로 [[서일]], [[구춘선]] 등과 함께 활동했으며, 책사로 지목되기도 했다. 그는 대왕청, 합마당, 서대포 등지에 분산되어 있는 소규모 독립군 단체들을 한데 통합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다 1920년 5월경에 왕청현에서 갑작스런 병에 걸려 사망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4년 장봉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종성군 출신 인물]][[분류:1879년 출생]][[분류:1920년 사망]][[분류:건국훈장 독립장]]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