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비 (문단 편집) === 죽음 === [[파일:장비 1.jpg]] [[낭중]] 환후사 내의 장비 무덤. 이곳에 몸이 묻혔고, 관우처럼 수급은 따로 충칭 쪽에 묻혀 있다. 당초 장비의 웅장위맹(雄壯威猛)은 관우에 버금갔으므로 위의 모신 [[정욱]] 등이 모두 [[관우]]와 장비를 칭하길 [[만인지적]]이라 했다. 관우는 병졸들은 잘 대해주었지만 사대부에게는 교만했고, 장비는 군자는 경애했지만 소인은 돌보지 않았다. 유비가 늘 이것을 경계하여 말했다. >경은 형벌로써 사람을 죽이는 것이 벌써 지나친데 또 매일 장정들을 채찍질 하고는 그들을 좌우에 있게 하니 이것은 화를 초래하는 길이오. 그러나 장비는 이를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선주전에 따르면 221년 6월, 거기장군 장비가 주변인에 의해 해를 입었다. 유비가 오를 정벌할 때 장비는 군사 1만 명을 인솔하여 낭중에서 출발해 강주에서 만나기로 했다. 막 출발하려고 할 때 장비 휘하의 장수 [[장달]], [[범강]]에게 살해 당하고 그 수급을 지닌 채 물길을 타고 내려가 [[손권]]에게로 달아났다. 장비 영(營)의 도독이 표를 올려 [[유비]]에게 보고했다. 유비는 장비의 도독이 표를 올렸다는 말을 듣고서 통탄해하면서 말했다. >아! 장비가 죽었구나. 앞서 유비가 늘 장비에게 형벌이 가혹하니 이를 고치라고 충고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범강과 장달의 살인은 [[가혹행위]]로 인한 [[상관 살해]]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고대의 군법이란 것은 굉장히 가혹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도 목이 날아갈 수 있었다.[* 고대까지 갈거없이 명대 병법서인 [[기효신서]]만 봐도 지금 기준으론 이게 적이랑 싸우자는 건지 아군끼리 다 죽이자는건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참형 규정이 많다.[[https://m.blog.naver.com/dbsgns2011/220826168669|#]] 하지만 그렇게 가혹한 군법을 셀 수 없이 집행해봤고 집행하는걸 봤을 정도로 평생 전쟁터를 누빈 유비가 장비를 콕 찝어서 지적했을 정도면 장비는 당시 기준으로도 두드러지게 혹독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범강과 장달이 대체 어떤 실수를 하고 어떤 형벌을 받았기에 하필 이릉대전 직전에 그들이 장비를 살해 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으니 현대의 우리에게 있어 이 부분은 상상의 영역이다. 정사에서 이들이 장비를 죽인 이유가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삼국지연의]]에서는 설정을 창작해서, [[관우]]의 죽음에 슬픔에 빠진 장비가 오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중 조의의 표시로 쓸 흰색 갑옷과 흰색 기를 사흘 안에 준비하라 했는데[* 시판되는 삼국지 서적에 따라 창, 칼, 화살 등으로 나오기도 한다.] 부장인 범강과 장달이 이는 불가하니 말미를 더 달라 하자 둘을 흠씬 패고는 말미를 내일[* [[신삼국]]에서는 약간 순화(?)해서 장비가 둘을 때리고 난 후 또 술을 마시면서 화를 조금 가라앉히고 조용히 "이틀 더 주겠다.(닷새 안에 준비하라)"라고 하고는 등짝이 걸레가 돼 엎드려 있는 그들에게 느닷없이 술을 권하고, 자기들은 지금 술을 마실 수가 없다고 답하자 알았다면서 자리를 떴다고 묘사되었다.]까지로 줄이니, 장비가 자기 [[관우|형]]만 생각하고 일을 그르칠사람이고, 어차피 못하면 둘 다 장비에게 사형당한다 생각하고, 이 둘이 잠 자고 있던 장비를 살해했다고 각색되었다.[* 일부 판본에서는 열심히 만들었지만 반 밖에 못해서 얻어맞고 결심한다.] 장비의 죽음은 유비에게 있어서 이릉대전의 대패의 또다른 커다란 이유이다. 전쟁터에서 평생을 살아온 베테랑 장비가 있고 없고는 유비와 촉군에는 결코 적지 않은 비중인데 그 장비가 전쟁 직전에 죽었으니, 유비에게는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참고로 장비는 이릉대전 직전에 죽고, 마초는 이릉대전이 펼쳐지는 중, 황충은 형주 공방전 1년 뒤에 세상을 떠나 관장마황조 5명 중 4명이 순식간에 사라졌으니 그 여파가 결코 작지 않았으리라. 유일하게 남은 조운은 강주를 감독하며 후방에 남아있었고, 제갈량은 유비가 원정을 나가면 본진을 총괄하는 역할이라서 결국 유비 혼자서 전선을 모두 집중 지휘하는 상황에 놓였다. 장비라도 살아있었다면 존재만으로도 병력을 2개로 가를수 있으니 육손이 두 무리를 상대해야하니 쉽지 않았을텐데 상대가 유비 하나밖에 없으니 세력이 크든 적든 오히려 상대하기 손쉬웠고, [[장판교|자기자신의 명성까지 이용하는]] 심리전과 의병지계에 노련한 장비가 생존해 있었다면 적어도 대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비가 살아 있었다면 이릉대전 발발시 그 휘하에서 실질적으로 병력을 지휘하는 건 거기장군 장비의 역할이었을 것이다. 개전 이후 유비의 움직임을 보면 자신의 본대와는 별도로 군사를 나누어 보낸 일이 잦았는데 장비는 그런 임무에도 적격이었다. 계한보신찬에 따르면 "관우와 장비는 무용이 뛰어나며, 몸을 바쳐 세상을 바르게 하고, 주상을 봉대하였으며, 기세는 호랑이처럼 장렬하였다. 주상의 좌우를 지키며, 전쟁터로 번개처럼 달려나가 격투하여 주상의 곤란함을 구하고 대업을 도왔다. 그렇지만 사람들과 교제하거나 대응함에 있어서는 무례하고, 아울러 흉악한 일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들의 얕은 생각과 몸을 훼손시키며 나라를 구한 태도를 애도한다."라는 평가를 내렸다. 후주전에 따르면 260년 가을 9월, 장군 관우, 장비, 마초, 방통, 황충의 시호를 추증했다. 죽고나서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시호가 내려진 것인데 장비의 시호는 환후(桓侯)라고 했다. 환우기(寰宇記) 86권에 따르면 낭주(阆州) 낭중현에 장비의 무덤이 있는데, 자사(刺史)의 관청에서 동으로 20보(步)에 있고, 높이는 1장(丈) 9척(尺)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