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비 (문단 편집) == 평가 == 일신의 용맹은 물론이고 군대의 지휘, 전술, 전략 모두 최상급인 '''[[용장]]'''이다. >하동의 관우 운장, 동군의 장비 익덕은 두 사람 모두 영웅 장사로, 선주의 무장이 되었다. >장비와 관우는 용맹이 삼국의 수위에 섰으니, 만인의 적이라고 칭해졌다. >----- >화양국지, 유선주지 관우와 더불어 당대에 이미 [[만인지적]]이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용맹과 무용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평을 받았고, 후대에는 아예 [[관장지용]]이라는 말로 용맹의 대명사가 되었다. 삼국지 시대에 수많은 걸출한 무장들이 있으나 [* 여포, 공손찬, 손책, 태사자, 장료, 감녕, 방덕, 정봉, 문앙 같이 개인 무용 면에서 엄청난 모습을 보여준 인간병기들이 즐비하지만, 당대인들의 평가에서 이들 중 가장 위명을 떨친 것은 만인지적이라는 관우, 장비였다. ] 그 중에서도 독보적인 무장이었던 것이다. 다만 상대적으로 삼국지에서 기록이 부실한 촉의 장군이었고, 관우에 비해서도 기록이 매우 적은 부분은 아쉬운 점이라고 볼 수 있다.[* 드라마, 게임 등 대중매체에서는 해석에 따라 관우라는 이름의 상징성과 위엄있는 이미지로 인해 관우의 무력을 더 높게 쳐주기도 하고 단순무식하지만 화끈한 무력의 이미지인 장비를 높게 쳐주기도 한다. 중국 쪽에서는 아무래도 무신으로까지 모시는 관우를 높게 쳐주는 경향이 강하다.] 기록된 것으로도 그의 장수로서의 면모가 충분히 드러나는데, 장판파에서 단기로 [[조조]]의 대군과 맞서 용맹을 과시했으며, [[유비]]의 입촉 시절에 형주에서 출발하여 파서를 박살내며 낙성까지 고속도로를 뚫어 기동전에 능한 것을 입증했다. [[한중 공방전]]에서 훗날 [[제갈량]]의 진격을 여러번 막아내는 명장 [[장합]]을 박살을 내며 한중 방어선을 초토화시켰다. 이는 이후에 '''[[조조]]'''가 한중을 회복하려 출병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며 작지 않은 공임을 알 수 있다. 수천년의 중국사에서도 장기전에 능한 장수는 드물다. 장비의 주군이자 군사적 재능으로 [[조조]] 다음가는 군웅이었던 [[유비]]조차도 이릉에서 장기전을 벌이다 대패한 것만 봐도 장비의 군사적 재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번성 공방전]]에서 온 천하를 진동시킨 [[관우]]와 더불어 [[만인지적]]이라는 평을 받은 유이한 장수. 연의에서 부각된 면인 무력이 뛰어난 장수의 모습에 더해 유능한 [[야전사령관]]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장비의 굵직한 군공의 대부분은 삼국지 연의에서도 대부분 묘사되었는데 대중에 [[허저]]에 버금가는 무력돼지로만 대중에 인식되는 것이 의아하기까지 하다. 다만 이건 '소설캐릭터' 장비의 캐릭터성 때문이기도 하다. 연의는 집필 당시 삼국지평화 등을 통해 중국 대중들에게 친숙했던 (실제 인물 장비와 전혀 다른) '단순무식하고 좌충우돌하는' 장비의 캐릭터성을 잘 살렸다. 예를 들어 조표와 갈등, 이에 따른 조표의 배반으로 서주를 뺏기게 된 것을 '술 좋아하는 장비가 술에 취해 사고를 쳤다'로 각색하거나 실제론 유비가 패버린 독우를 장비가 팬 것으로 각색하는 등. 워낙 그 묘사가 맛깔났고 원래부터 '단순하지만 매력적인 장비' 캐릭터 자체도 인지가 높았기에 장비=싸움 잘하지만 단순함이 확연히 각인되어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주인인 [[유비]]가 도망다닐 때도 이미 천하에 이름을 떨친 [[관우]]와 더불어 절대 두 마음을 품지 않은 의리, [[위연]]이 자기를 제치고 한중 태수로 임명되었을 때도 불평하지 않는 대인의 그릇까지 겸비한 호걸이었다. 단기로는 [[항우]], 별동대를 지휘하면 [[하후연]], 대군을 이끌면 [[법정(삼국지)|법정]]이 되는 식인데, 이게 [[삼국지연의]]가 아닌 '''[[정사 삼국지]]'''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즉, [[사기 캐릭터]]. 다만 [[관우]]에 비해서도 검증된 정사에서의 자료는 더더욱 적은데, 확실한 것은 [[관우]]와 더불어 독보적인 당대 제일의 무장으로 칭송받았다는 정도이다. [[정사 삼국지]]에 직접 묘사된 것 이외에도 화려한 군공이 있었을 것으로 추즉되며, 정사에서의 기록들만으로도 예사롭지 않은 인물.[* 곽가와 정욱은 장비를 관우와 더불어 만인지적이라 평했으며, 주유 역시 관우와 장비는 맹수처럼 용맹한 장수라 평하면서 둘을 자신이 지휘할 수 있다면 대업이 가능하다고 호언장담했다. 실제로 남군 공방전 때는 아예 유비에게 직접적으로 장비를 잠깐 빌려달라고 요구했을 정도다.] [[삼국지연의]]에서 묘사되는 [[관우]]와 장비의 이미지는 관우는 침착하고 장비는 물불 가리지 않는 성격이지만, [[정사 삼국지]]에서 보이는 모습은 [[관우]]는 열혈, 장비는 냉혈로 연의와는 오히려 정반대다. [[관우]]는 언행이 완전히 일치되고 솔직한 사람이었고 장비는 호걸이지만 유비가 우려할 정도로 차가운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관우는 이름 있는 명사들에게는 오만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너무 솔직담백한 성격 탓에 오만함이 부각되어 보이는 부류다.] 병졸에겐 관대했고, 장비는 군자는 경애했지만[* 제갈량을 끝까지 꺼리던 관우와 달리 장비는 제갈량이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자 곧바로 제갈량을 인정했다. 사실 관우도 인정하긴 했다. 유비의 총애를 나누게 되는 걸 질투했을 뿐(...).] 소인은 돌보지 않았다. 장비에겐 '''못난 사람을 어루만져줄 포용력이 부족했다.''' 이는 장비의 인생에서 잘 드러난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자신과 맞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고 그때문에 맞지 않더라도 어울려 사는데 이것을 우리는 사회생활 혹은 사회성이라고 부른다. 장비에겐 이것이 부족했다. 일찍이 사대부 출신에 돈이 많았던데다가 자신과 죽이 잘 맞는 유비, 관우와 함께 했으니 고칠 필요성도 못 느꼈을 것이고 있었더라도 고칠 타이밍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유학에서 군자는 유학적 식견이 뛰어나고 인을 깨달은 자로서 인간됨이 훌륭하고 사리가 능한 사람이다. 즉, 완벽한 인간군상. 불교의 부처와 플라톤의 철인과 어느정도 동치되는 개념이다. 반대로 소인은 어리석고 아둔하며 깨우치지 못한 자로, 유교에선 군자가 이들을 교화시켜야 한다 말한다. 즉, 군자와 소인은 잘나고 못나고의 개념이 아니라 인품이 뛰어나고 말고를 의미하는 것이며 군자를 경애하고 소인에 무례하다는 말은 쉽게 말해 '무식하고 예의 없는 놈 봐주는 꼴이 없었다.'로 해석 가능하다.] * 사로잡히고도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는 [[엄안]]을 존중하여 회유했다. * 식자로 유명한 [[유파(삼국지)|유파]]와 교류하려다 대놓고 모욕을 받고도 그냥 덮고 넘어갔다.[* 정확히 말하면 격노했다는 기록은 있긴 한데 그냥 화만 냈지 딱히 뭘 했거나 앙심을 품은 것도 아니다. 심지어 이때 유파의 행동은 [[촉한]] 진영은 물론 [[동오]]에서도 이 얘기를 두고 떠들 정도로 퍼졌을 만큼 소문이 좍 났으니 장비 입장에서는 개망신을 톡톡히 당한 셈인데, 화만 내고 넘어간 수준이면 관용이 부족하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 [[유비]]가 자신을 추천하는 중신들의 의견을 뿌리치고 병졸 출신 [[위연]]을 한중태수로 삼았을 때도 군말없이 수긍했다. * 평소 수하들에게 가혹했고 하필 [[이릉대전]]을 앞두고 부하인 [[범강]]과 [[장달]]에 의해 살해당한다. 군자는 능력이 뛰어나거나 인품이 고결하여 존중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고 소인은 둘 다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다. 능력과 인품이 모두 평이한 사람이 출세할 확률은 낮으니 장비는 자연스레 부하들에게 가차없는 상관이 되었고, 사대부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 소인이 있으면 그들에게는 무례하게 대했다. 장비가 살았다면 [[이릉대전]]은 물론이요, [[제갈량의 북벌]]도 그 판세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보는 사람들이 많다. 당장 이릉대전 때 그가 살았다면 거기장군, 영 사례교위라는 그의 직책 상 [[풍습]] 대신 대도독이 되어 선봉에 섰을 것이다. 또 제갈량의 1차북벌 때 장비가 살아서 마속 대신 가정을 틀어막았다고 생각해보자. 장비가 철저하게 격파한 적 있는 [[장합]]이 상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많은 것이 바뀌었을 것이다. 후에 딸인 [[경애황후]]가 죽자 유선의 태자를 낳은 후궁이 있는데도 언니의 뒤를 이어 [[장황후]]가 황후가 되었다. 장비의 두 딸이 연속으로 황후가 되는데, 조조가 자기 딸 셋을 황후+후궁으로 들인거 생각하면 촉한에서 장비의 존재감은 정말 대단했을 것이다. [[관우]]는 촉 땅을 밟은 적도 없으니...그럼에도 장비 일가가 외척으로서 촉한 정계에 영향력이 없었다는 것[* 끽해야 장비의 차남인 [[장소(촉한)|장소]]가 중신으로 활동하고 장손인 [[장준]]이 무장으로 활동한 기록 밖에 없는데 관우나 조운의 자손들하고 비교해봐도 딱히 어마어마한 차이는 아니다. 오히려 [[오호대장군]] 중 친족이 가장 높은 관직에 올라간 것은 유비 세력 소속의 역사가 가장 짧았던 [[마초]]이며 종제인 [[마대]]가 평북장군까지 올라갔었다.]을 생각하면 촉한이 얼마나 공신+외척이 활개치지 못하는 국가인지 알 수 있다.[* 이는 유비 세력이 유비라는 존재 단 하나로 뭉친 세력이기에 충성심이 뛰어난 자들이 뭉쳤으며 힘든 시절을 함께 동고동락한 이들이 많으니 여기서부터 다른 세력과는 차별화 된다. 더군다나 위연마저도 유비에게 충성했으니. 그런데 제갈량이 내정하면서 철저한 관료제/능력중심 국가를 만들고 철저한 법치에 따라 국가를 관리하였는데 유비가 죽을 때 제갈량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했으니 이엄말고는 이미 공신 세력이 다 죽고 자식들만 남은 촉한에서 누구도 제갈량의 권위를 위협할 순 없었다. 유비 세력의 마지막 맏어른인 조운도 공명정대하고 청렴했기에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공신이고 외척이고 감히 누가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을까. 즉, 안 그래도 공신 세력은 유비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했고 번성~이릉 전후로 갑작스럽게 관우, 장비, 법정, 황충, 마초, 미축 등 공신 세력들이 사망하였는데다가 살아남은 조운은 욕심이 없으며 유비가 사망하면서 제갈량에게 모든 권한을 일임했고 그에 따라 철저한 관료제 형식의 법치 국가를 세웠으니 공신의 자손이나 친척들이 감히 권위를 내세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장비는 천하에 위용을 떨친 용장이었으나 장수로서 필요한 모든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사람으로서의 포용력이 부족해 결코 덕장이 될 수 없었고, 그것이 본인의 발목을 잡게 된 무장'''이라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