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장쉐량 (문단 편집) ==== 장제스의 의도 설 ==== >近來對日外交性情緊迫, 彼國朝野上下'''公然密謀侵佔我東北'''(彼方謂為滿蒙), 勢甚積極, 不可終日. >근래 대일 외교의 형세가 긴박합니다. 일본은 조정과 재야 상하를 가리지 않고 공공연히 우리의 동북(그들 말로는 만몽)을 침공할 것을 밀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 또한 적극적이며 끝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 >당시에 장쉐량이 장제스에게 보낸 전보문 중 일부분, 차이잉원 정부에서 공개. 통념과는 달리 장쉐량은 일본의 야욕을 알고 있었으며, 부저항은 오히려 장쉐량 본인이 아니라 상관 장제스의 의도였다는 주장이 제시되고 있다.[* 이와 같은 주장이 한국어 위키백과에도 그대로 실려 있는데, 중국 공산당 측 사관이나 아라이 도시아키의 저서 반역자의 내용을 그대로 따온 부분이다.] 다만 이런 주장도 설득력이 부족한 것이 장쉐량은 장제스의 명령을 무시하는 상태였고, 만주의 독립세력으로 컨트롤이 거의 되지 않았다. [* 열하사변 당시 장제스는 명목상으로만 중국을 통일했을 뿐 중국의 각지에 각자도생하는 거대 군벌들이 깔려 있는 상태였다. 운남왕이라고까지 불리던 룽윈의 전계 군벌, 산서의 토황제로 불리던 옌시산의 염계 군벌, 중앙의 법제도에 저항하여 독자화폐까지 만들던 계계군벌 등 중국은 이합집산하는 군벌들의 느슨한 집합체였다. 참고로 [[중화민국/군벌#s-3.1|중화민국 군벌]] 문서를 보면 당시 상황이 대단히 난장판이었음을 잘 알 수 있다. 특히나 장쉐량의 경우 중국을 통일할 뻔했다는 평을 듣는 아버지의 거대한 봉천군벌 세력을 물려받은 중국 유력 군벌이었다. 비유하자면 1931년 시점의 장제스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마냥, '당신이 섬서성 유력자니까 그쪽 전선은 당신 군벌이 담당하시오'식의 느슨한 지배력 정도만 행사할 수 있는 정도였고 직접적 통제력이 미치는 영역은 난징과 중국 동남부 일대의 한정된 지역에 한했다. 이같은 모래알 조직력은 중일전쟁 초기 대참패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 국민당의 통치는 북벌과 반장전쟁을 거치면서 이제 막 안정화되려던 참이었고, 국민당에게 빌린 것이라고는 국민당 명의 외에 없는 대다수 군벌들은 국민당 중앙의 말에 복종하기는 커녕 오히려 수틀리면 국민당 내부의 여러 정객들과 연합하여 독자적인 당중앙이나 정부를 선포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반장전쟁이 반장파들의 참패로 돌아가고, 이후 난징 국민정부가 법폐개혁, 초공작전, 징병제 실시 등으로 계속 강화되면서 예전처럼 자기 맘대로 개기는 것은 불가능해졌지만 만주사변이 발생하던 시점은 당과 정부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본격적으로 강화되기 이전의 파편적인 상황이었다. 만주의 상황은 역치, 말 그대로 깃발만 바꿔서 단 것이지 중앙의 통제력은 전혀 미치지 않았다. 명목상으로만 국민당 휘하일 뿐 사실상의 자치권을 보장받은 독립국가에 가까웠다. 장제스 비판 레퍼토리 중 가장 고질적인 것이 군벌을 통제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묘하게도 장제스의 힘이 제일 약했던 상황 중 하나인 1931년에 중국 2위의 군벌인 장쉐량을 전화와 전보만으로 조종할 수 있었다는 정반대 결론이 내려지곤 한다.] 세금도 안 보내고 온갖 명령을 다 씹던 치사한 인간이 부저항만 장제스가 시킨대로 했다는 주장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만에 하나 부저항이란 명령이 내려왔다 한들 장쉐량이 매번 하던 것처럼 명령을 무시하려면 충분히 할 수 있었으니, 부저항은 철저하게 장쉐량 본인의 의중에 맞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또한 위의 전보문은 장쉐량이 일본의 야욕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설명해주지만, 장제스가 부저항이란 명령을 내렸다는 근거는 전혀 제시하지 못한다. 윗 문단의 주장은 장쉐량을 추켜세우고 장제스를 깎아내리고자 하는 중국 공산당 측의 입맛에 맞는 내용이며[* 중국 공산당은 항일전쟁에 나서던 국민혁명군을 기습하는 등 중일전쟁의 혼란 속에서 세력을 키우는 것에만 골몰했던 원죄가 있다. 때문에 항일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애썼다.] 통념을 반박하기는 커녕 전형적 음모론에 가까운 것이다. 또한 '장제스가 부저항하라고 장쉐량에게 시켰다, 모두 장제스 때문이다'라는 주장이 오히려 기존의 통념이며, 현대 중국 공산당이나 중국인들의 일반적 상식에 가깝다. 그런 내용의 책들이 한국의 서점에 깔려 있고 [[김용옥|도올]] 같은 대중 지식인이 TV에서 그걸 정설인 것마냥 강의하는 것이 현실이다. 장제스는 왕징웨이와의 내전[* [[1차 양광사변]]은 대단히 심각한 사태였고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 한 일본에 저항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초공작전까지 중지하려는 움직임과 함께 군대를 북상시켰다. 만주사변이 아니었다면 광저우 정부는 더 이상 살아남지 못했을 것인데 만주사변에 대응하느라 모든 것이 틀어지게 된 것이다.[* 광저우 정부의 왕징웨이 같은 인물들은 만주사변이 벌어졌음에도 항일은 도외시하고 장제스 하야와 집권에만 목숨을 걸었고 일본과 협상하여 만주 점령을 용인하려고 들기까지 했다. 이후 이들은 친일파, 한간으로 변질된다.] 또한 국제연맹에 일본의 침략을 제소함과 함께 장쉐량의 단독협상 시도를 막으려 했다.[* 동북군과 관동군의 국지적 사태가 아닌 국가 단위의 문제로 본격화시키기 위함이다.] 부저항과는 전혀 맞아떨어지지 않는 움직임이다. 장제스가 장쉐량에게 부저항 지시를 내렸다고 믿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으나, 증거가 딱히 없는 상황이다. 유일하게 찾을 수 있는 근거라곤 장쉐량의 비서장 궈웨이청의 회고 단 하나 뿐이다. 장제스가 전화를 통해 장쉐량에게 부저항하라는 지시를 몇번이고 내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사료 등으로 보충되지 않는 개인의 주장에 불과하며, 장제스는 신중한 대응과 지속적인 보고를 요청했을 뿐 사태 파악이 전혀 되지 않는 상태로서 지시를 내릴 만한 여건이 전혀 안 되어 있었다. 만주사변 이전에도 장쉐량은 독립왕국의 군주 격으로서 장제스는 그저 장쉐량의 여러 행동을 묵인할 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장쉐량 스스로도 NHK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부저항은 중앙정부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고 밝힌 바 있다. 만주 사변 이전까지 장제스의 대일방침이 충돌을 삼가며 도발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이었고[* 일본과 중국의 전쟁역량은 상대가 안 되었고, 1937년 시점에서도 중국이 개작살이 났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장쉐량의 판단이 이런 방침에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고 가정은 할 수 있다. 그러나 간첩혐의자에 대한 총살이었던 [[나카무라 사건]] 등 이전까지 일본이 저지른 도발과 연대 규모 병력의 기습으로 본격화 된 만주 사변은 차원이 다른 사건이다. 도발에 넘어가지 말라는 방침이 일본의 자작극에 반응하지 말고 전쟁 위협을 회피하란 것일 수는 있겠으나, 이미 전쟁을 걸어온 일본군에 자동문을 열어주며 총 한 발도 안 쏴보고 두들겨 맞으면서 만주를 넘겨주라는 내용일 리는 없다. 남경에서 내부수습에 정신을 못 차리던 장제스가 만주의 사정이 파악이 되었을 리도 없고 일본이 도발을 해오는지 전쟁을 걸어오는지 파악하고 적절한 대처를 내려야 했던 건 장쉐량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