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쉐량 (문단 편집) === 부친의 전사 === 1926년에는 [[국민당의 1차 북벌]]에 맞서 봉천군벌을 지휘했다. [[중국국민당]]은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분열해서 내분에 들어갔으나 [[영한합작]]을 통해 통합하여 1928년에는 [[국민당의 2차 북벌]]에 나서게 되었다. [[국민혁명군]]의 공세에 봉천군은 패퇴를 거듭하여 [[베이징]]을 내주게 되었다. 그런데 봉천으로 퇴각하여 후일을 도모하던 부친 장쭤린이 관동군의 음모인 [[황고둔 사건]]으로 사망하고 일본이 매우 강압적으로 국민정부와 접촉하지 말 것을 요구하자 이에 반발하여 반일감정을 품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의 자리를 승계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협조가 필수적이었으므로 집권 초기에는 쇼와 덴노의 즉위식에 사절단을 보내는 등 일본에 친화적인 모습을 보였다. 결국 일본과 [[장제스]] 사이를 오가는 줄다리기 외교 끝에 [[중국국민당]]에 입당하였고, [[동북역치]]를 통해 난징 국민정부에 복속한다. 이후 [[양위팅]], 창인화이(상음괴)를 비롯한 사관파를 숙청하여 권력을 공고히 하였으며 1929년 [[반장전쟁]]이 일어났을 때 줄곧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고 [[1차 장풍전쟁]] 정도에만 소극적으로 개입했지만 1930년 [[중원대전]]에서 막판에 장제스의 편을 들어줘서 국민당을 승리로 이끈 공로로 국민당의 2인자까지 꿰차게 된다. 이때 짧은 장쉐량의 전성기가 찾아오는데, 화북 지역 대부분을 점령하고 봉천군벌의 영향권으로 편입한 것이었다. 그러나 1929년, 만주의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중동로 사건]]을 일으켰다가 [[바실리 블류헤르]]가 지휘하는 [[소련군]]에게 두들겨 맞았고 일본이 화북을 들쑤시기 위해 일본으로 망명한 [[옌시산]]을 귀국시키는 한편, 1차 양광사변 이후 광저우 국민정부의 사주를 받은 [[스여우싼]]이 난을 일으키는 등 중원대전의 대승으로 얻은 영토는 자꾸 줄어갔다. 장쉐량은 얻은 영토를 사수하기 위해서 자꾸 만주 본토를 팽개치고 관내에 깊숙이 개입했다. 그리고 1931년의 [[만보산 사건]]과 [[나카무라 사건]] 때 일본의 도발을 야기할까봐 계속 부저항 정책을 고수했다. 이후 [[관동군]] 작전 참모였던 [[이시와라 간지]]의 주도로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사정은 급변한다. 장쉐량은 이를 기존과 같은 소규모 국지도발 정도로 오판하고 부저항 정책을 지시했으나 알고 보니 만주사변은 만주 전체를 침탈하려는 대규모 침공이었고 그간 장제스가 군사 지원을 빌미로 만주까지 먹어버릴까 봐 한사코 이를 거부해 온 장쉐량은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리고 증원군을 요청하였으나 이미 [[초공작전]]과 [[1차 양광사변]]으로 정신 없던 장제스에겐 그럴 여력은 없었고 장쉐량 본인도 소극적 대응으로 일관하다가 주요 도시를 다 날리고 열하까지 밀리고 나서야 뒤늦게 항전을 명령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이유인 즉슨, 사변 초기 ([[전면전]]의 빌미를 주지 않으려던) 장쉐랑이 '''일본군이 어떤 공격을 해와도 적대해서 저항하지 마라'''라는 사실상 [[비폭력주의|비폭력]] 엄명을 내리는 바람에 쉽사리 밀리게 된 거고, 그 결과 얻게 된 '부저항'(不抵抗)이란 꼬리표는 장쉐량 생전은 물론이고 죽은 뒤에도 따라다니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