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장쉐량 (문단 편집) === [[열하사변]]과 패주 === 그 후 자신의 16만 병력을 수습해 최후의 영지인 열하성을 통치했으나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리다 [[열하사변]]에서도 패하고 [[산해관]] 안으로 철수, [[왕징웨이]]를 비롯한 중국의 실력자들에게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퇴하라는 맹비난을 받았고 결국 견디지 못하고 장제스에게 사임 의사를 밝혔다. 사퇴 후 유럽으로 잠시 외유를 떠났다가 돌아와[* 이때 [[베니토 무솔리니]] 영도 하의 [[이탈리아 왕국]] 등을 방문하여 [[파시즘]]에 호의적인 생각을 품고 장제스를 파시즘 지도자로 내세워 중국을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실상 낭인 신세로 전락한 채 서쪽의 [[산시성(산서성)|산시 성]] 부근에 주둔한다. 하지만 여기는 이미 군벌 [[양후청]][* 이후 그와 함께 [[시안 사건]]을 일으킨다.]이 거느리는 서북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더 서쪽인 옌안에는 막 [[대장정]]을 끝낸 [[마오쩌둥]]의 공산군 약 4만명이 자리잡고 있었다. 때문에 장제스는 여기 주둔한 장쉐량을 서북 초비 부사령관으로 임명 후 공산군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이후 공산군의 게릴라 전술에 번번히 참패한 장쉐량은 점차 이렇다 할 지원 없이 자신을 몰아붙이는 장제스에 대해 불만을 품고 비밀리에 공산군과 강화를 맺고 장제스에게 초공을 중단하고 공산당과 합작하라고 간곡히 설득했지만 장제스는 크게 화를 내면서 거부하고 정 초공이 싫으면 복건성이나 안휘성으로 떠나라고 했다. 하지만 복건이나 안휘로 떠난다는 것은 초공은 안할 수 있어도 더 이상 중국 정치계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는 의미였으므로 장쉐량으로서는 따를 수 없는 조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