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쉐량 (문단 편집) == 기타 == * 대만에서 연금 생활을 할 때 하나의 일화가 있었는데, 장제스의 생일날 장쉐량은 '시계'를 선물했다.[* 사실, 시계 선물은 중화권에선 일종의 금기인데 '시계를 보내다' 하는 '送鈡'하고 장례를 치른다는 '送終' 하고 발음이 같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일종의 '''죽어라''' 식의 [[고인드립]]을 친것이다.] '''"많은 시간이 흘러간 만큼 이제 연금을 해제해 줘도 되지 않겠느냐?"''' 라는 물음이었으나 장제스는 답례로 [[낚싯대]]를 선물로 보냈는데 이건 '''"아직 멀었으니까 세월이나 낚고 있으라"''' 라는 뜻이었다. 집 안에 연못이라도 있지 않는 한 낚싯대 가지고 할 수 있는 놀이가 있을 리도 없으므로 대놓고 장쉐량을 조롱한 것이다. * 그의 사후 5년 뒤 [[2006년]] 그의 유품들이 고향인 [[랴오닝성]]에서 전시되었는데, 개중엔 [[미키 마우스]] 인형과 [[용자 시리즈]] 장난감도 있었다. 가택연금이 낳은 비극인가, 아니면 [[키덜트|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가? 사실, 50년 넘는 기간동안 가택연금을 당했을 때 그 긴 시간동안 할 수 있는 일이 하도 없으니까, 역사 연구에 몰두해서 명, 청조 시대의 굉장한 권위자가 되었다고 하니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 젊었을 적엔 잘생긴 외모로 민국 4공자 중 하나로 꼽혔다. 민국 4공자로 누굴 꼽는 지에는 여러 의견이 있다. 위안커윈([[위안스카이]]의 아들), 돤훙강(군벌 [[돤치루이]]의 아들), 장샤오뤄(기업인이자 쑨원의 조력자 장젠의 아들), 우바오추(청의 군인 우장칭의 아들), 루사오쟈(군벌 [[루융샹]]의 아들), 장보쥐(군벌 장전팡의 아들) 등이 4공자로 꼽힌다.[* 외모라는건 상대적인 기준이기도 하고, 잘생긴 사람이 따져보면 귀한건 아니다 보니 4공자, 8공자, 10공자까지도 들며, 군벌 자녀 뿐 아니라 극작가 메이란팡, [[후스]]등 비군인, 순리런, [[장링푸]] 등 중일전쟁기의 장군들, 거기다가 [[저우언라이]], [[왕징웨이]], 하다못해 '''[[장제스]]'''도 든다.] 그러나 어느 조합이든 장쉐량은 꼭 들어간다. 이로 인해 숱한 여성들과 염문을 뿌렸다. 심지어 [[쑹메이링]]과의 관계도 인구에 회자된다. 유럽을 방문했을 때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딸인 에다 무솔리니와 바람을 피웠다는 염문설도 돌았다. 그런데 당시 에다 무솔리니는 이미 [[갈레아초 치아노]]와 결혼한 상태였다. * 그가 남긴 여러 로맨스 중 죽을 때까지 해로한 2번째 부인 자오이디(趙一荻, 조일적)와의 이야기는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연애사다. 자오이디는 16세 때 무도회에서 유부남인 장학량을 만나 사랑에 빠져 그의 비서로 일했는데, 이후 장쉐량이 연금되자 그를 따라가 함께 생활했다. 본처인 위펑즈(于鳳至, 우봉지)는 그 정성에 감동하여 기꺼이 이혼하고 정식 결혼을 허락했다. 재미있는 게 두 부인 모두 장쉐량과 마찬가지로 장수했다는 것. 위펑즈는(1897 ~ 1990) 93세, 자오이디는(1912 ~ 2000) 88세까지 살았다. * [[중국]]에서는 이러한 농담이 전해져 온다고 한다. [[술]]과 [[담배]]를 멀리한 [[린뱌오]]는 64세에 죽었고,[* 다만 린뱌오의 경우는 자연사가 아니라 [[9.13 사건|비행기 사고]]로 사망.] 담배를 멀리하고 술만 즐긴 [[저우언라이]]는 78세에 죽었고[* 사인은 [[방광암]].], 술은 멀리하고 담배만 즐긴 [[마오쩌둥]]은 83세에 죽었으며, 술과 담배를 모두 즐긴 [[덩샤오핑]]은 93세에 죽었다. 하지만 술과 담배는 물론이고 [[마약]]에다가 [[여자]]까지 즐긴 장쉐량은 103세까지 살았다는 것이다.[* 근데 사실 마오쩌둥도 [[호색한|여자에 환장한]] 인물이긴 했다.] [[http://blog.naver.com/whtmdtkd?Redirect=Log&logNo=30157934602|#]] 게다가 장쉐량은 심지어 유년 시절부터 [[약쟁이]]였다. 1930년대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15세부터 했다는데,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3122800209101008&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33-12-28&officeId=00020&pageNo=1&printNo=4687&publishType=00010|#]] 해외 웹에서는 1924년부터 한 것으로 나온다. [[http://books.google.co.kr/books?id=rbBgAQAAQBAJ&pg=PA19&lpg=PA19&dq=Zhang+Xueliang+morphine+1924&source=bl&ots=hQ4NHibavB&sig=k2-ZDUMco8WWZwnOx9cp9H_yIYI&hl=ko&sa=X&ei=0SsCU-fOLayKiQeUioCoAw&ved=0CCsQ6AEwAA#v=onepage&q=Zhang%20Xueliang%20morphine%201924&f=false|#]] 비록 34세 때이던 1933년에 끊기는 했지만, 무려 10년 가까이를 약쟁이로 보낸 것이다. 그 덕택에 중국에서든 대만에서든간에 [[주당]], [[골초]]들이 술이나 담배를 끊으라는 훈계나 충고를 받을 때마다 반례로 써먹는 예시(?) 중 하나이기도 한다. 다만 장쉐량은 1936년 시안 사변 이후 사실상 정치 생명이 끝나 거의 남은 생 전체를 가택연금으로 보냈던 반면 위에 열거한 다른 인물들은 죽을 때까지 정치 싸움을 했으므로 받은 스트레스의 양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비슷하게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와 권력투쟁을 벌였다가 정계에서 축출된 소련 공산당 간부들(말렌코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등등) 역시 일찌감치 피튀기는 정계에서 벗어난 덕분에 자기들을 몰아내고 최종 승자가 된 흐루쇼프보다 엄청 오래 살았다.] * [[만주사변]] 당시 재만조선인들을 장쉐량 휘하의 군대가 대규모로 [[학살]]한 적이 있었다. 1931년의 대규모 배화폭동 이후 수 많은 [[화교]] 난민들은 당시 [[봉천군벌]]의 지도자였던 장쉐량 측으로 몰려갔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만주사변]]까지 발생하자 분노한 장쉐량의 [[군대]]는 수많은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학살]]과 [[약탈]]을 실행하였다. 당시 [[봉천]]의 일본 총영사관에서 [[조선총독부]] 관방외사과로 보낸 자료에 따르면 이 당시 재만조선인들이 입은 피해 규모는 사건 이후부터 7개월 동안 살상, 약탈 등은 2,500여 건에 달하였고, 학살당한 사건만 193건이나 되었다. 반면 일본 조선군사령부 측의 자료에 의하며, 1931년 10월 말까지 조선인 피해의 장소와 시간이 밝혀진 사건만, 학살 323건, 능욕 50건, 소실가옥 300건, 약탈호수 약 2,000건에 달하였고, 확실하지만 조사 중인 사건이 학살 180건, 능욕 100건, 소실가옥 500건, 약탈호수 1,000건을 헤아렸으며, 이 외에 조사가 불가능한 오지 방면의 피해 수는 이보다 배에 달할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하지만 당시 언론에 보도된 피해상황을 종합해 보면, 이보다 더 심하였는데 최근 연구에 따르면, 1931년 9월 20일부터 1932년 1월 9일까지 재만조선인의 피해 상황은 사망 843명, 행방불명 807명, 부상 362명, 납치 110명, 금품강탈 36건, 구타 13명, 강간 6명 등이었다.[* 이명종, 근대 한국인의 만주인식 연구 = The Koreans' discourses on Manchuria during the modern period, 2014, 185쪽]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alternative_history&no=335608&_rk=zx3&page=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