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장쉰 (문단 편집) === 신해혁명 === 1910년 10월 장쉰은 [[양쯔강|장강]] 방어군 사령관이 되어 포구에 총사령부를 두고 장강 연안의 방어를 맡았는데 황제에게 직접 상주할 권리도 받았다. 1911년 7월 그는 강남제독이 되었다. 그런데 1911년 8월 [[신해혁명]]이 터지면서 청조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장쉰은 맨 처음 봉기가 일어난 무창을 진압하려 했으나 무창으로 출병할 허락을 받지 못해 무산되었다. 혁명은 [[쑤저우]]로 확대되었고 다시 전국에 퍼졌다. 양강총독과 [[만주족]] 지휘관들이 장쉰과 만나 싸울 것인지 남아 지킬 것인지를 의논했다. [[난징]]의 모든 문무관원은 [[신해혁명]]의 폭발력에 겁에 질려 있었고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장쉰은 양강총독 등을 꾸짖으며 백기를 걸면 비록 동료지만 반역자로 간주하겠다고 소리쳤고 이에 양강총독과 지휘관들은 모조리 달아났다. 다음날 9여단이 반란을 일으키자 장쉰은 이들을 추격하여 공격했다. 하지만 반란군의 규모는 갈수록 거대해졌고 장쉰은 식량이 떨어지고 원군도 없어 지연전을 펼치며 장강 북부로 퇴각했다. 1911년 9월 장쉰은 강소순무에 임명되었고 임시 양강총독 겸 임시 남양대신이 되었으며 2등 세습 귀족 지위인 경기도위 작위를 받았다. 하지만 청조의 붕괴는 걷잡을 수 없는 것이라서 12월에 공화국 선포와 더불어 위안스카이가 임시대총통이 되었다. 선통제는 1912년 2월에 퇴위했다.[* 물론 형식상으론 퇴위가 아니라 그저 통치권을 잃은 것 뿐이었다.] 전투 중인 모든 부대는 무기를 버리고 공익을 위해 전투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하달받았다. 황제에게 충성하는 부대들도 황제에게 충성한다면 더 이상 싸우지 말란 명령이 내려오자 장쉰도 언젠가 복벽이 이루어질 것이라 곱씹으며 전투를 중지했다. 그 휘하의 장강 방어군은 국방군 선봉대, 즉 무위전군이 되었으며 장쉰은 직예, 산동, 하남의 반란 토벌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하지만 장쉰은 반란을 토벌하지 않고 부대를 연주로 이동시켰다. 1912년 4월 쉬스창이 전문렬과 함께 장쉰을 찾아 양강총독직을 폐지하고 양홍기한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하겠다는 위안스카이의 뜻을 전했다. 이에 장쉰은 이렇게 대답했다. >"[[위안스카이|원공]]의 깊은 은혜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선통제|황제 폐하]]에 대한 신하로서의 의무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원공이 조정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제가 원공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1913년 정월 위안스카이는 융우태후와 [[선통제]]를 [[이화원]]으로 옮기려 했는데 이에 장쉰이 크게 반발하여 위안스카이의 결정을 철회시켰다. 얼마 후 융우태후가 사망하자 장쉰은 국장과 복상을 요구했으며 자신도 지역 명사. 상인, 군인, 시민들을 거느리고 추모식을 거행했다. 구체제의 붕괴로 공자에 대한 제사 폐지 운동이 벌어지자 폭도들이 산동성 곡부의 공자 사당의 나무를 베고 제기들을 약탈하기 시작했는데 이에 장쉰은 군사를 파견하여 제기를 지켰다. 이후 정부가 공자묘의 제전을 몰수하고 연성공에게 세습되는 수입을 빼앗아 연금으로 대체하자고 하자 장쉰은 이 역시 결사반대하여 철회시켰다. 장쉰은 이를 성인의 영험함의 덕분이며 자신이 그 대리인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1913년 6월 황홍이 강녕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냉휼이 서주를 점령하여 북부를 침공하자 장쉰은 냉휼의 군대를 이랑산에서 패퇴시키고 서주를 탈환했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장쉰을 육군대장 즉 상장으로 승진시키고 강북진무사 자리를 주었다. 1913년 7월 [[계축전쟁]]이 발발하자 장쉰은 청강과 양주 사이 전 지역에 걸친 1,000여리의 반란군을 모조리 토벌했다. 장쉰은 진강을 점령하고 난징까지 진격하여 격전 끝에 8월 초 난징을 점령했다. 이에 장쉰에게 가화장, 문호장 등의 훈장이 수여되었으나 장쉰은 이를 모두 거절했다. 이후 위안스카이가 그를 강소도독에 임명하자 장쉰은 군사지휘권을 위해 이를 수락했다. 중국의 반란군이 토벌되고 다시 통일이 이루어지자 장쉰은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위안스카이는 이를 반려하고 12월에 그를 장강순열사에 임명했다. ||[[파일:복벽이전의 장쉰.jpg]]|| || 예복을 입은 장쉰 || 1915년 8월 주안회가 활동을 개시하고 중앙정부에서 위안스카이의 제제에 대해 의견을 구하자 장쉰은 이를 극력반대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끝내 [[홍헌제제]]를 단행하고 [[중화제국(1915~1916)|중화제국]]을 선포하여 황제로 즉위하려고 했다. 장쉰은 일등 공작 작위를 받았으나 이를 거절했고 황실의 권리와 특전을 승인하고 자금성과 조정을 보호해달란 청원을 올렸으나 무시당했다. 1915년 12월 15일 [[차이어]], [[량치차오]]가 운남에서 호국군을 조직하여 거병했고 이는 전국적인 [[호국전쟁]]으로 번졌다. 이때 장쉰은 강소독판 [[리춘]], [[진윈펑]], 탕향명 등과 함께 위안스카이에게 하야를 촉구하는 연명 통전을 보냈고 견디지 못한 위안스카이는 3월 23일 제제를 취소했다. 1916년 3월 장쉰은 순열사 및 안휘독군이 되어 호국군을 토벌하려 했으나 6월 6일 위안스카이가 사망하면서 취소했다. 이후 [[안휘군벌]] [[돤치루이]]와 연계하여 안휘성장 겸 안휘독군 [[니쓰충]]과 함께 독군단회의를 개최, 대리총통 리위안훙을 핍박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