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아이링 (문단 편집) == 생애 == 청대 관료의 후예이자 수구파였던 장즈이[* 張志沂(Zhāng Zhìyí)]와 유학 경험자인 신여성 황이판[* 黄逸梵(Huáng Yìfán)]의 사이에서 1920년에 태어났으며, 1살 아래 남동생인 장쯔징[* 張子静(Zhāng Zǐjìng), 1921 ~ 1997, [[중화민국]] 시절엔 은행원으로 일하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상하이로 가 중학교 교사로 전직했다.]이 있다. 친할머니인 리쥐어우[* 李菊藕(Lǐ Jú'ǒu)]는 [[리훙장|이홍장]]의 딸이었다. 1923년 아버지를 따라 [[톈진시|톈진]]로 이사를 갔고, 이듬해인 1924년, 서당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고모와 함께 자기와 남동생을 두고 도망치듯 유럽으로 유학을 가 버렸다. 남매는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고, 이때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쾌락촌(快樂村)》을 냈다. '''당시 7세'''. 1928년 아버지의 사직으로 장씨 가족은 다시 상하이로 돌아왔다. 이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삼국지연의와 서유기, [[칠협오의]]를 접했다. 1930년 어머니와 고모가 돌아오고, 장잉은 10살에 어머니의 고집으로 미국 교회 산하인 황씨소학(黄氏小學)에 6학년으로 편입했는데 이때 영어 이름 [[아일린]](Eileen)을 본떠 장아이링으로 개명한다. 같은 해 부모는 이혼을 하여 아버지 쪽에서 살게 되었고, 이듬해 상하이의 성 마리아 여학교에 입학해 1년 후인 1932년에 그 곳에서 첫 단편소설 《불행한 그녀(不幸的她)》를 교지[* 봉조(鳳藻) 12호]에 실었다. 이 작품은 《국광(國光)》 등 교외 잡지에도 실린다. 1933년엔 산문 《늦깎이(迟暮)》를 발표하는 등 1937년 졸업할 때까지 많은 작품을 투고했다. 하지만 계모의 사소한 오해로 친부에게 심한 학대를 받아 1938년 친모에게로 도망쳤고 같은 해에 [[런던대학교 국제프로그램]] 입학 시험을 수석으로 통과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전란]] 때문에 런던대학 입학을 포기해야 했고, 1939년 [[홍콩대학]] 문과에 입학해 첫 번째 작품 《천재몽(天才夢)》을 출간했지만, 1942년 [[진주만 공습]]으로 홍콩대학마저 휴교를 하여 상하이로 돌아가 세인트존스 대학교에 지원했지만 '''국어 점수가 낮다고''' 불합격하여 학업을 중단했다. 대신, [[타임(주간지)]] 등 영문 잡지에 기고를 하며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걸을 준비를 한다. 1943년 5월 《자몽란(紫羅蘭)》이라는 월간지에 《첫 번째 향로(沉香屑·第一炉香)》를 발표하여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같은 해에 《두 번째 향로(沉香屑·第二炉香)》, 《재스민 차(茉莉香片)》, 《결국은 상하이 사람이다(到底是上海人)》, 《심경(心經)》, 《경성의 사랑(傾城之戀)》, 《금쇄기(金鎖記)》등을 발표했다. 1944년 《봉쇄(封鎖)》를 투고한 걸 계기로 친일 장교인 후란청(胡蘭成)과 만나 결혼했다. 하지만 후란청은 3개월 만에 불륜을 저질렀고, 계속 그를 찾아 헤매다 지친 장아이링은 결국 1946년 그와 연을 끊었다. 이때 《꽃이 지고(花凋)》, 《홍예희(鴻鸞禧)》, 《붉은 장미와 흰 장미(紅玫瑰与白玫瑰)》를 썼으며 소설집 《전기(傳奇)》와 산문집《유언(流言)》을 출간했다. 1947년 영화 『아줌마 만세(太太萬歲)』와 『못 다 이룬 사랑(不了情)』의 각본을 썼다. 1951년 량징(梁京)이라는 필명으로 장편소설 《십팔춘(十八春)》을 연달아 발표한다. 1952년 7월에 [[홍콩]] 미국신문처(美國新聞處)에서 번역 일을 맡았고, [[노인과 바다]] 등을 번역했다. 이때부터 다른 사람과 거의 만나지 않았다. 1955년 미국으로 간 장아이링은 이듬해 [[뉴잉글랜드]]에서 65세의 라야(Laya)라는 독일 출신 작가를 만나 재혼했으나, 2년 후 그와 사별했다. 1967년 뉴욕 레드클리프 여학원에 머무르며 《해상화열전(海上花列傳)》[* 1894년 청나라 말엽에 한방경(韓邦慶)이 [[오어]]로 쓴 소설. [[1999년]] [[허우샤오셴]]이 [[해상화|영화화]]했다.]을 영어로 번역했다. 1969년 대만에서 구작 《십팔춘》을 《반생연(半生緣)》으로 고쳐 출간했고, [[캘리포니아 대학교/버클리 캠퍼스]] 중국 연구 센터에 들어가 2년 일하고 나왔다. 1972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본격적으로 은거를 했다.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 《[[색, 계]](色,戒)》[* 1979년 중국의 시사지 《인간(人间)》에 발표한다.], 《망연기(惘然記)》, 《대조기(對照記)》 등의 명작을 남기고 홍학[* [[홍루몽]]을 연구하는 학문.]에도 전념하다 1995년 9월 1일경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9월 1일경'''이라고 쓴 것은 그가 사망할 때 주변에 아무도 없어 정확한 사망일을 알기 어려웠고, 시신을 부검한 의료진이 그날 죽었을 거라 추측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시신은 9월 8일에 로스앤젤레스에서 발견되었으며, 부검이 끝난 뒤 화장되어 9월 30일 태평양에 뿌려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