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아이핑 (문단 편집) == 생애 == 1910년 1월 9일 쓰촨에서 태어났다. 1926년에는 [[공청단]]에 가입했고 1928년에 [[중국 공산당]] 입당을 허가받았다. 1929년에는 홍군에 입대했고 [[정치장교|정치위원]] 등을 지내다가 1934년 홍군대학을 졸업하고 3군단 4사단 정치위원 등을 지냈다. [[대장정]]에도 참여했다.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도 연달아 참전했다. 1949년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중국 본토가 공산정권의 통치 아래에 놓이면서, 제3야전군 참모장 등을 지냈다. 그 해에 화동군구 해군사령관을 지내기도 했는데, 이 부대는 [[동해함대]]의 전신이었다. 그를 중국의 첫 해군사령원으로 보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중국이 중일전쟁이나 국공내전 당시에 해군이라 할 만한 게 거의 없었다. [[파일:external/i1.sinaimg.cn/U1220P27T1D549840F26DT20090423151519.jpg]] 해군 시절 잠깐 해군부대 지휘관을 하다가 다시 육군으로 왔다. 주로 국방과학기술위원회 등에서 미사일, 로켓, 핵무기 개발[* [[양탄일성|중국 최초의 핵실험]] 당시 직접 참관하고 저우언라이에게 보고한 사람도 장아이핑이었다.] 부문에 정통한 기술군인으로 활동했고 1955년에 상장 계급을 받았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신임을 받던 [[첸쉐썬]]과의 대립을 겪었고, 결국 [[문화대혁명]] 당시에 [[홍위병]]의 폭행으로 치료를 못받고 수감생활을 하다가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 되었다. 하지만 [[저우언라이]]가 비밀리에 치료 등을 지원하면서 풀려난다. [[덩샤오핑]]이 문혁을 수습하면서 그도 복권되었고, 1982~1988년 제6대 국방부장([[국방장관]])까지 지냈다. 1989년에 [[천안문 6.4 항쟁]]에서 군부의 유혈진압을 반대하였다. 3대 해군사령원이었던 [[예페이]]도 그와 함께 진압에 반대하는 서명을 보냈다. 2003년 7월 5일에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장남 장샹은 [[중국 인민해방군 제2포병부대]] [[부사령관]](중장)을 지냈고 차남 장셩은 대교(준장)까지 복무했다. 외손자는 [[왕양]]의 딸과 결혼했다. 남동생 장찬밍은 외교부 부부장, [[최고인민검찰원]] 부검찰장을 역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