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영재 (문단 편집) == 아마추어 시절 == 경복고 시절, 1994 중고연맹회장기 대회 결승전에서 용산고등학교를 꺾고 우승하며 최우수선수상 수상에도 기여했다. 이후 농구선수권 대회 청소년 대표팀에서도 활약했다. [[파일:1998년 MBC배 준우승팀 명지대학교.jpg|width=540]] 명지대학교로 진학한 1996년에는 '''모든 대회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처참한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1997 대학농구연맹전]] 예선리그 A조 2차전 경기에서 1년차 선배 [[박재일]]과 함께 더블 포스트를 이끌며 중앙대학교를 80-63으로 꺾고 대승을 세우는 등에도 기여했으나 결승전에서 [[연세대학교]]에게 패하며 아쉬운 준우승을 기록했다. 게다가 [[1998 MBC배 전국대학농구대회]] 승자 토너먼트 준결승전에서 [[연세대학교]]에게 패하며 탈락했지만, 패자부활전 경기에서 [[길도익]], [[이병석(농구)|이병석]] 등과 함께 준준결승전에서 [[중앙대학교]]를, 준결승전에서 [[한양대학교]]를 각각 제압하고 마침내 결승전에 진출했으나 [[강혁(농구)|강혁]]이 분전한 [[경희대학교]]에게 73-84로 패해 또 한번 준우승을 기록했다. 대학 졸업 후, 1999 KBL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9순위로 원주 나래 해커스에 지명을 받은 직후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의 유니폼을 입었지만, 프로 대신 곧바로 상무에 입대를 하게 되었다.[* 1998년 당시 나래와 기아 간의 맞트레이드((원주 나래 get [[허재]]-데릭 존슨 ↔ 부산 기아 get [[정인교(농구)|정인교]]-[[제이슨 윌리포드]])를 했을 때 원주 나래가 신인지명권을 부산 기아에 양도했다. 따라서 프로 데뷔는 나래가 아닌 기아였다.][* 당시에는 처음으로 신인지명권을 양도하긴 했으나, 신인지명권 트레이드를 공식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주 나래 유니폼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지명권 양도는 18년만인 2016-17시즌에 들어서야 공식으로 인정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