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욱제 (문단 편집) == 연기자 시절 == 1942년 [[서울특별시|서울]] [[을지로4가|주교동]] 태생으로 [[동성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입시에 낙방하여 [[재수(입시)|재수]]를 하던 중 갑자기 공부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모든 것을 포기했는데, 이를 보다못한 형이 [[동국대학교]] [[연극학과]] 원서를 사와서 "너는 [[연극]]을 한 번 해보는 게 좋겠다. 밑져야 본전인 셈 치고 시험이라도 보라"고 권유하여 응시한 장욱제는 예상을 뒤엎고 합격하면서 본격적으로 연기 공부를 하게 되었다. 1964년 [[KBS]] 공채 4기 [[탤런트]] 시험에 응시하여 무려 2,993명 중 남자 13명, 여자 20명만 뽑는 무지막지한 경쟁률을 뚫고 합격의 영광을 안았지만[* 동기생으로 [[이일웅]], [[김진해]], [[남일우]], [[반효정]] 등이 있었다.] 초기 수년 간은 단역이나 [[보조출연자|엑스트라]] 역할에 머무를 뿐이었다. 그래도 장욱제는 동대문시장 같은 사람 많은 곳을 찾아다니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외모나 말투, 행동거지 등을 수첩에 적으면서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스스로 연구했고 [[함경도]]에서 월남한 시장 상인과 친해져서 그에게 [[동북 방언|함경도 사투리]]를 배우기도 하는 등 열심히 연기를 공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를 지켜보며 장욱제를 기특하게 생각한 연출가 겸 극작가 '''이남섭'''[* 1934~1985.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유학]]까지 다녀온 실력파 [[프로듀서]]이자 작가였으며, [[여로(드라마)|여로]] 등의 수 많은 히트작을 집필하였다. 평소 드라마 연출은 본명인 이남섭을 내세웠지만 대본 명의는 '''이석진'''이란 가명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후 이남섭이 줄곧 연출과 각본까지 독점하는 것에 대하여 KBS의 연출자들과 연기자들이 "당신만 연출이랑 대본까지 다 해먹느냐?" 라며 배척하면서 거의 쫓겨나다시피 KBS에서 나온 후 [[문화방송|MBC]] 드라마 [[3840 유격대]] 등을 집필하고 [[시인(문학)|시인]]으로도 활동했지만, 말년에는 KBS 공채 1기 [[탤런트]]인 [[아내]] '''김난영'''(1941~1985)의 [[매니저#s-2|매니저]] 역할로 전락하였다. 1985년 사랑하는 아내 김난영을 [[신장암]]으로 먼저 떠나보낸 후에 자신도 [[혈액암]]으로 시름시름 앓다 얼마 안가 세상을 떠난 [[순애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이 그를 중용하였고 '''일망타진 일보직전, 임자 있었네''' 등의 드라마에서 주역은 아니었지만 개성있는 [[신 스틸러]] 역할로 시청자들에게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1969년 장욱제는 KBS 일요사극 '''녹슬은 단검'''의 조연인 '''돌쇠''' 역으로 출연했는데 주연보다 오히려 눈에 띄는 코믹 연기로 호평을 얻으면서[* 당초 녹슬은 단검의 주연은 [[신성일]]의 뒤를 잇는 미남 배우로 인기를 끌던 '''오영일''' 이었고 장욱제는 오영일의 [[방자#S-2|방자]] 역할이었지만, 오영일의 연기가 워낙 딸려서(...) 어쩔 수 없이 장욱제의 비중이 늘어났다고 한다. 참고로 1960년대 영화계의 청춘 스타로 인기를 누리던 오영일은 1971년 배우를 그만둔 후 사업가로 전직하여 성공하였고 2020년 향년 76세를 일기로 [[죽음|작고]]하였다.] PD이자 작가인 이남섭은 아예 장욱제를 후속작 격인 '''의리의 사나이 돌쇠'''의 타이틀 롤로 앞세우면서 그는 유명 연기자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남섭 작가의 다른 코믹 드라마인 '''10분 쇼'''[* 제목 그대로 10분 분량의 이 드라마는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운동]] 등 국책 사업을 소재로 한 일종의 홍보 드라마였다.] 에서는 [[함경도]] 출신의 꼬장꼬장한 [[꼰대]] 대서사 역을 맡아 이전에 배운 걸직한 함경도 사투리를 유창하게 구사하면서[* 당시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대한민국 표준어|표준어]]를 쓰는 것이 상식이던지라 방송에서 [[사투리]]를 쓰면 이채롭게 보던 시절이었다.] 동네 [[공인중개사|복덕방]] 주인 역할인 [[송해]]와의 콤비 연기로 시청자들의 인기를 끌기도 했다. [[파일:영구_여로.jpg|width=50%]] [youtube(3akekRh4aSQ)] 1972년 4월, 장욱제는 KBS 일일연속극 [[여로(드라마)|여로]]에 주인공인 [[영구(여로)|영구]] 역으로 캐스팅되어 절륜한 [[바보]] 연기와 더불어 아내 분이 역의 [[태현실]]과 가슴 절절한 호연을 선보이며 '''드라마 시청률은 70~80%로 폭발하는 대박을 이끌어 냈고''', 이 때 대다수의 어린 아이들이 "땍띠야 땍띠야" 등등 영구 말투를 흉내내며 부모님과 선생님들이 [[뒷목잡기|뒷목을 잡을]] 정도로 영구 [[신드롬]]이 퍼져나가는 공전절후의 인기를 누렸다.[* 바로 전 해인 1970년 [[동양방송|TBC]]의 드라마 [[아씨(동양방송)|아씨]]가 굉장한 인기를 끌었지만 TBC의 시청권은 [[서울특별시|서울]]과 [[부산광역시|부산]]에 한정되어 있었는지라 타 지역에선 [[아오안]]이었을 반면, KBS는 진작에 전국 네트워크를 구축한 상태였기 때문에 굳이 비교한다면 여로의 파급효과는 아씨를 훨씬 능가했을 것이다.][* 한 가지 더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국영방송]]이었던 KBS는 매달 징수원들이 각 가정을 방문하여 [[시청료]]를 걷었는데, 이전에는 "재미없는 방송만 내보내면서 무슨 시청료냐?" 라고 불평하며 시청료 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시청자들이 여로가 방영된 뒤에는 시청료 징수원에게 "좋은 [[드라마]]를 방영해줘서 고맙다" 면서 기꺼이 시청료를 지불했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장욱제는 확고부동한 스타 자리에 오르며 전성시대를 구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장욱제를 스타로 만든 영구 역할은 양날의 검이 되어 돌아왔고, [[이창훈(코미디언)|바보 이미지가 지나치게 굳어버린 장욱제는 이후 어떤 역할을 맡더라도 자꾸 영구가 [[오버랩]] 되는 바람에 시청자들의 몰입이 깨질 수 밖에 없었다.]] 고민 끝에 장욱제는 연기를 잠시 그만두고 [[가수]]와 예능프로 [[MC]]로 외도하기도 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거두지 못한 채 다시 연기자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조금씩 연기에 대한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