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장의 (문단 편집) == 생애 == 친구였던 [[소진(전국시대)|소진]]과 함께 [[귀곡자|귀곡선생]]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학업을 모두 마치고 귀가한 이후, 여러 제후국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이상을 열심히 유세하고 다녔다. 처음에는 [[초(춘추전국시대)|초(楚)나라]]로 가서 그곳의 재상과 술을 마셨는데... 재수없게도 그 자리에서 초나라 재상이 아끼던 귀중한 벽옥(碧玉)이 없어지고 말았다. 재상의 빈객(賓客)들은 모두 장의를 의심하며, ''''장의 이 자는 매우 가난해서 품행이 좋지 못하다. 재상의 벽옥을 훔친 것은 반드시 장의 소행일 것이다.''''라고 하였고, 이에 여럿이 장의를 붙들어 매고는 곤장 몇백 대를 호되게 쳤는데[* 당시의 곤장은 20대 정도만 맞아도 죽는다. 아마도 중국 특유의 과장으로 추정. 혹은 회초리로 치는 태형을 곤장으로 오기한 것일 수도 있다.], 아무리 매질을 해도 자백은 커녕, 자신의 범행을 철저히 부인하여 의미가 없었는지 때리던 매를 그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결국 처참한 장의의 모습을 본 그의 아내가 탄식을 하며 말했다. >"당신이 책을 끊고, 유세 따위를 하지 않았다면 이런 꼴도 당하지 않았을 것이 아닙니까? 농사나 지을 것이지... 괜히 송사리가 용 노릇하겠다고 하니까 험한 꼴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자 장의는 아내의 이 말을 듣자, 생뚱맞게도 이렇게 물었다. >"내 혀가 아직 있는지 없는지 보시오?"(視吾舌尙在不?) >"혀가 있네요." 웃으며 말하자, >"그럼 됐소"라고 말하였다. 그 무렵 소진은 조나라 왕을 설득해 합종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진나라가 제후들을 공격해 합종을 깨트리지 않을까 염려해 적당한 인물을 진나라로 보내 막기로 했다. 그는 장의에게 사신을 보내 은근히 자신에게 오기를 권유했다. 솔깃한 장의는 소진이 있는 조나라로 가 그를 만났으나 소진은 일부러 그를 늦게 만났으며, 대접도 대청 아래 앉게 하는 것으로 푸대접을 했고 식사도 마부나 첩이 먹는 음식을 주며 이리 꾸짖었다. >"자네처럼 재능이 있는 자가 이토록 곤궁하니 보기가 딱하군. 내가 자네를 추천하여 부귀를 누리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자네는 거두어 쓰기에는 부족한 인물일세." 그리고 장의를 돌려보냈는데, 옛 친구에게 이런 치욕을 당한 장의는 조나라를 응징하기 위해 [[진(통일왕조)|진(秦)나라]]로 떠났다. 그 후 소진은 가신에게 일러 은밀하게 장의를 도울 것을 명령했다. 가신은 명령대로 장의에게 금전과 편의를 대주되 누가 시킨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마침내 진나라의 [[혜문왕]][* [[상앙]]을 죽였던 그 태자가 맞다.]을 알현한 장의는 좋은 인상을 얻어 객경의 벼슬을 얻었다. 소진의 가신이 하직하고 떠나려고 하자 장의는 깜짝 놀랐는데, 이때 가신은 비로소 자신의 정체를 밝히며 소진이 일부러 장의를 격분시켜 진나라로 보내 벼슬을 하게 한 후 진나라가 조나라를 쳐 합종의 맹약을 깨지 않게 하려고 했다는 설명을 했다. 이에 장의는 탄식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 이 또한 제가 배운 술책 중에 있던 것인데, 미쳐 깨닫지 못했구려. 저는 분명히 소진에 미치지 못하오. 이제 갓 등용된 제가 어찌 조나라를 칠 계획을 꾸미겠소. 돌아가거든 소군(소진)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해 주시오. 소군이 살아있는 한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며 무슨 일을 꾸밀 수 있겠는가 하고 말이오." 장의는 진나라의 재상이 된 뒤 초나라 재상에게 격문을 써서 보냈다. > "지난날 그대와 술을 마셨을 때 내가 그대의 벽옥을 훔치지 않았는데도 그대는 나에게 매질을 가했다. 그대는 그대의 나라를 잘 지키라. 나는 그대의 성을 빼앗을 것이다."[* 훗날 장의는 이 경고대로 유독 초나라에게만 다른 국가들에 비해 치명적인 손해를 안긴 것으로 톡톡히 복수를 했다.] 그리고 그는 이후 소진의 [[연(춘추전국시대)|연(燕)]] · [[조(전국시대)|조(趙)]] · [[한(전국시대)|한(韓)]] · [[위(전국시대)|위(魏)]] · [[제(춘추전국시대)|제(齊)]] · 초(楚) 등 6국이 세로로 합하여 진나라에게 대적하는 합종책에 대항해서 오히려 위(魏) · 조(趙) · 한(韓) · 제(齊)나라 등의 제후국을 설득하여 '''진나라를 중심으로 이 나라들을 전부 가로로 연이어지게 하여 동맹관계를 맺는 연횡책을 제시해 합종책을 완벽히 깨버리게 된다'''.[* 마침 중간에 소진이 제나라에서 암살당했기 때문에 거리낄 필요가 없었다. ] 허나 혜문왕이 죽은 뒤에 장의는 권력에서 밀려났다. 태자 시절부터 장의를 싫어했던 [[무왕(진)|무왕]]은 장의를 멀리했고, 제후들은 무왕과 장의 사이가 벌어진 것을 알고 다시 합종했다. 결국 장의는 위나라로 떠났으며[* 장의의 측근 장수였던 위장(魏章)도 함께 쫓겨난다.], 그곳에서 엄청난 환대를 받으며 재상이 되었지만 겨우 1년 만에 사망했다. 다만 최근 연구 결과 장의의 경우, 실제로는 소진(기원전 310년 활동)보다 앞서서 활동했으며, 진나라의 천하 통일 시기와는 100여 년 정도의 거리가 있다. 또 혜문왕 때 [[쓰촨 성|촉]]으로 영토를 넓히는 것을 반대하고, [[주나라]] 방면을 정벌할 것을 주장했으나 혜문왕이 파, 촉 정벌을 주장한 [[사마착]]에 의견을 따르고 장의에 의견은 따르지 않았는데, 이것이 되려 배후지와 후일 통일의 기반을 확보하는 탁견이 된 지점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