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이 (문단 편집) === 초한전쟁 시기 === 이후 [[항우의 18제후왕 분봉]] 때 장이는 조나라 땅을 나누어 따로 상산왕(常山王)이 되었지만, 진여는 공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남피 주변의 3개 현을 조금 떼어주는 정도에서 끝나게 되었다. 이때문에 열이 받은 진여는 [[전영]](田榮)이 [[항우]]에게 대항할때, 그 군사를 빌려 장이를 날려버렸다. 이 때문에 도망치게 된 장이는 당초에 항우에게 도망칠 생각이었지만, 주위 사람들의 충고를 듣고 당시 상산의 상국이자 항우의 심복이었던 [[항영]](項嬰)을 죽이고, 삼진을 평정 중이었던 유방에게 합류하게 되었다. 이후에는 유방과 보조를 맞추었다. [[고제(전한)|유방]]은 [[팽성대전]]에 앞서 진여의 도움을 구하려고 했지만, 진여는 '''장이를 죽이면 군사를 보내주겠다'''며 강짜를 부렸다. 자기에게 의탁한 사람을 죽일 수 없었던 유방은 장이와 비슷하게 생긴 죄수의 목을 보내 진여의 군사를 빌리는데 성공했는데, 팽성대전에서 대패하면서 이 사실이 진여에게 알려졌고, 진여는 유방을 적대하게 되었다. 장이 쪽의 생각은 알 수 없지만, 장이의 아들 [[장오]]는 이 일에 엄청나게 감격해서 원체 무례한 유방에게 온갖 수모를 겪고도 분통을 터뜨리는 신하들을 '지금 우리가 목숨 부지하고 복을 누리는게 다 누구 덕인데 감히 무슨 소릴 하는 거요?'라며 오히려 꾸짖기도 했다. ~~정작 유방은 이런 마음도 몰라주고 죽이네 살리네 했다~~[* 사실 이건 장오의 신하들이 유방의 암살을 획책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원래 사위였던 장오를 죽일 생각은 한 적이 없었고 다만 아무래도 입장이 입장이라(앞서도 말했다시피 유방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장이 부자에게 굉장히 잘 대해줬다.) 개인적인 만남이 있었을 때 장오에게 무례하게 대했던 것을 그 부하들이 선비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고 분노해서 일을 벌인 것이었다. 이후로도 장오를 가두긴 했지만 이 일에 대해 장오는 관여하지 않았고 여후의 탄원도 있었으므로 금방 풀어줬고 왕 자리만 박탈했다.] 이후 [[한신]]의 북벌에 [[조참]](曹參) 등과 함께 같이 나서 대나라와 조나라 평정에 도움을 주었다. 결국 한신이 [[정형 전투]]에서 [[배수진]]을 이용해 진여의 군대를 격파함으로서, 진여는 참살되었고 장이는 원수를 갚게 되었다. 이후에는 한신이 유방에게 부탁하여 조나라 왕에 임명되었다. 2년 뒤에 장이는 사망했는데, 유방은 장이에게 경왕(景王)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장이의 아들인 장오가 조왕을 이어받을 수 있게 하고는, 장녀인 노원공주(魯元公主)를 장오에게 시집 보냈다. 이후 [[유경]]이 흉노의 묵돌에게 황실의 공주를 시집보내서 유화책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하필 그 후보가 이 노원공주였다. 유방은 유경의 주장을 받아들여서 노원공주를 시집보내려 했다. 그러나 [[고황후 여씨]]가 강하게 반대하고 또 미혼도 아닌 이미 개국공신의 아들과 결혼한 딸을 다시 흉노에게 보내는 것도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라서 결국 유방은 이를 철회하고 일반 백성의 딸을 공주로 속여서 보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