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인환 (문단 편집) == 생애 == [[평안도]] [[평양부]]에서 출생해 어렸을 때 [[부모]]를 모두 여의며 [[고아]]가 되었고 1894년 [[평양부]] 중앙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입교한 [[감리교]]인이자 상항한인연합교회의 창립 멤버로 큰 길에 나가 큰 소리로 복음을 전도했던 [[https://kmc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6172|열렬한 신앙인]]이었다. [[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1905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으며 [[철도]] 노무자, [[어부]] 등으로 생활하였다. 1908년 미국 외교관이자 [[친일파]]인 더럼 스티븐스가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자 일본 덕분에 한국 [[백성]]들이 잘 살게 될 것이라는 [[망언]]을 하게 된 것에 격노하여 [[전명운]]과 함께 [[샌프란시스코]] 기차역에서 휴양차 [[기차]]에 승차하려던 [[스티븐스 저격사건|스티븐스를 사살]]하였다. 전명운 의사가 먼저 스티븐스를 찾고 [[저격]]하려 하지만 [[권총]]이 불발되는 바람에 서로 육탄전이 벌어진다. 전명운 의사는 권총을 뒤집어 잡고 그립으로 스티븐스의 [[얼굴]]을 [[구타]]했으나 더럼 스티븐스도 반격에 나선다. [[체격]]의 차이로 전명운 의사가 한참 열세였는데 같은 목적으로 그 자리에 온 장인환이 등장했고 장인환 의사는 전명운 의사의 고성으로 인해 상대가 더럼 스티븐스임을 [[눈치]]채고는 그의 [[등]] 뒤에 권총 3발을 발사한다. 이 중 1발은 전명운 의사의 [[팔]]에 총상을 내고 나머지 2발이 스티븐스의 [[가슴]]을 맞췄으며 스티븐스는 [[병원]]으로 실려갔지만 얼마 못 가 죽었다. 장인환과 전명운은 서로 만난 적도 없는 사이로 당연히 이 [[암살]]을 사전에 상의한 적도 없는데 두 사람이 동시에 스티븐스를 저격한 것은 [[우연]]의 일치였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장인환/chang_chun02.png|width=100%]]}}}|| || {{{#fff '''수감직후 촬영된 장인환의 [[머그샷|{{{#fff 머그샷}}}]]'''}}} || 전명운과 함께 미국 법정에 선 장인환은 2급 [[살인]] 혐의로 재판에서 [[징역]] 25년형을 선고받아 샌퀜틴 주립[[교도소]]에서 복역하게 되었는데 전명운은 공범 혐의에 대한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교포]] 사회에서 많은 성금으로 [[변호사]]를 고용해주고 변호인의 노력과 그의 애국심을 알게 된 현지 [[판사]]들의 배려에 따라 모범수로 10년 감형되어 복역하고 석방되는데 한인 [[교회]]의 목사와 [[기독교]]인들이 장인환을 변호하고 그의 출소에 축하회를 열었다고 한다. 1927년 [[조만식]] 등 조선 [[민족]] 지도자들의 환영을 받으며 귀국하여 18세의 윤치복과 혼인하고[* <매일신보> 1927.6.1. 十八歲妙齡新婦와 五十歲의 老新郞] [[평안북도]] [[선천군|선천]]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는 등 사회 사업에 투신하였으나 [[일본 제국 경찰]]의 감시를 이기지 못하자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갔다. 1930년 병고(病苦)를 앓게 되면서 투신 [[자살]]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