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정구 (문단 편집) == 프로 입문 == 같은 해 전국체전 부산 예선은 결국 장정구가 프로 데뷔를 하게 만드는 계기인데, 부산예선에서 우승을 '''했지만 또''' 장홍민이 출전권을 가로챘고 이에 소속 관장과 사범은 분노, 결국 프로로 전향을 한다. 프로데뷔 준비 당시에 WBC 前 챔피언이자, "소매치기 복서"로 유명한 김성준의 스파링 파트너가 되었는데 당시에 놀라운 실력을 보여줄 정도였다. 그 덕분에 한국 복싱계의 "대모"이자 큰손인 심영자[* 여성의 몸으로 굵직한 복싱 매치를 주선하는 수완을 보일 만큼 당시 강력한 위치에 있었던 프로모터였다.]의 귀에 들리게 된다. 데뷔전은 그 당시 프로 복싱 영웅들의 등용문과도 같았던 "MBC 신인왕전"이었는데, 데뷔전 포함 6연승을 질주하며 해당 체급 우승과 우수선수 선정을 거머쥔다. 82년 7월까지 18연승(7KO)을 질주, 결국 당시 WBC 챔피언이었던 일라리오 사파타에게 도전을 하게 된다. 장정구는 그때 심영자의 후원을 받고 있었는데 심영자가 살고있던 워커힐아파트에서 숙식 중이었다. 그런데 어린이대공원 잔디밭에서 맨발로 마무리 스트레칭을 하던 도중에 '''엄지손톱만한 유리조각을 밟게 되고''' 이로 인해 부상을 당하게 된다. 부상 후 3주 정도의 휴식을 의사는 권고했으나 경기의 연기는 1주일 정도였다. 부상 후유증과 제대로 된 훈련 스케쥴을 치르지 못한 장정구는 82년 9월 18일, 일라리오 사파타와의 타이틀 매치에서 15라운드 1-2 판정패했다. 후에 장정구는 "이 패배가 없었다면 15차까지 방어를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에게는 의미있는 경기였다고 한다. 경기 패배 이후 심영자는 6개월 후에 재도전을 성사시킬 정도로 많은 지원을 해주었는데, 장정구는 자신이 패배한 이 경기를 비디오로 돌려보며 분석을 했다고 한다. 이 이후에도 상대방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습관이 형성되어 복싱 인생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고. [[파일:external/www.geojesiminnews.co.kr/18852_9291_3919.jpg]] 결국 6개월만에 다시 만난 리턴 매치에서 일라리오 사파타를 일방적으로 압도, 3회 TKO로 쓰러뜨리며 83년 3월 26일 [[세계 권투 평의회|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에 등극했다. 당시에 한국에는 세계 챔피언이 없던 상태였고 '''세계 타이틀 도전 11연패'''를 기록하던 중이었다. 장정구는 당시 일본의 복싱 영웅 구시켄 요코[* 이름을 보면 여자인 것 같지만 남자 선수로, [[오키나와]] 출신이라서 오키나와어를 일본어로 가차하다보니 특이한 발음의 이름이 된 것이다.]가 가지고 있던 세계 타이틀 방어 13차를 넘어서 14차, '''15차'''를 성공시킬 정도로 대선수가 되는데 전성기 시절 그의 연수입이 당시 돈으로 '''2억'''이 넘었다고 한다. 85년 프로스포츠 선수 수입 순위 중 단연 1위는 장정구였는데 그 금액이 무려 2억 4100만원을 기록하였다. 참고로 당시 올림픽 복권의 1등 당첨금이 1억원이었으며, 막 태동하던 시기고 팀 스포츠라는 건 감안해야 되겠지만 프로야구의 경우 재일교포로 한국프로야구로 영입된 거물 [[장명부]]나 [[김일융]] 연봉이 각각 8800만원, 8600만원, "무쇠팔"로 유명한 [[최동원]]도 7000만원이었다고 하니 그 수준을 알만하다. 물론 보너스나 광고비 등 부가수익은 더 있긴 했겠지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