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정구 (문단 편집) == 쇠락과 위기 == 하지만 15차 방어 달성 이후 그에게 먹구름이 드리웠다. 그의 복싱 인생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 자체에서도 전처와의 불화가 커졌고 결국 전처와 [[이혼]]을 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전처는 장모와 함께 장정구의 전재산을 가져간다.[* 정확히는 전처가 장정구의 재산을 계속 빼돌렸고 결국 남은 재산을 이혼 위자료로 뜯어간 것이다. 이혼을 할 경우 전처에게 줘야 할 돈이 거액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100% 다 뜯어가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추정되는 금액이 현재의 가치로 수십~수백억원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돈일 듯한데, 가령 경기당 7천만원 정도를 받았다고 하는 장정구의 언급을 예를 들어서 15차 경기를 계산하면 10억 5천만원에 이르는데 지금 돈으로는 당연히 더 가치가 있다고 봐야 한다.[* 참고로 1980년대 후반 짜장면값이 약 700원 정도 했다.] 결국 추가 방어를 더 할 수 있음에도 다소 이른 은퇴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전처에게 전재산을 빼앗기고 링에 다시 오를 수밖에 없었던 장정구는 복귀를 하게 된다. 그 후 세계 챔피언 탈환을 위해 3번의 타이틀 매치를 치렀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이건 장정구의 전처가 사기꾼이라서 이렇게 된 것인데 일단 학력부터 장정구는 초졸인 반면 전처는 전문대까지 졸업했다. 즉, 운동만 해서 그런지 사회 생활에 어리숙했던 장정구로서는 영락없이 당한 것. 첫번째 타이틀 매치는 움베르토 곤잘레스와의 89년 8월 27일 경기, 12라운드까지 접전을 펼쳤지만 확실히 밀리는 경기를 한 끝에 판정패했다. 그러나 나머지 2경기는 편파적인 판정에 패배하였는데 2번째 타이틀 매치는 장정구가 챔피언이었던 시절 3차 방어 상대인 소트 치탈라타였다. 판정까지 경기를 끌고 갔는데 보기엔 장정구의 우세였지만 실제 판정은 소트 치탈라타의 손을 들어주었고, 1991년 열린 3번째 상대인 무앙차이 키티카셈과의 경기는 그의 마지막 커리어를 KO 패배로 장식케 함과 동시에 90년대 이후 암울한 한국 프로 복싱의 미래를 암시하는 상징적인 장면 중 하나이기도 했다. 사족으로 당시 한국 복싱 열기가 식어가는 시점과 맞물려 복싱 흥행과 프로모터들간의 첨예한 이익싸움에 장정구가 손해를 봤다는 식의 주장도 있다. 어쨌든 무앙차이 키티카셈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장정구는 11라운드까지 무려 4번의 다운을 뺏으면서 내용면에서 챔피언을 이기고 있었으나 마지막 12라운드에서 체력 안배를 생각치 않고 무리하게 파이팅을 벌이다 결국 KO패로 끝났다. 이에 대해 여러 복싱팬들이 왜 우세한 경기를 했음에도 무리하게 나섰느냐고 묻기도 했는데 후에 장정구는 인터뷰에서 "내용은 이기고 있어도 채점이 밀리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장정구는 그 이전 2경기에서 석연찮은 편파 판정에 의한 판정패를 당해온 탓에 무앙차이 키티카셈 상대로는 '''KO밖에 답이 없다'''고 판단해 무리하게 공격하다가 지쳐서 KO패를 당했다는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