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종(금) (문단 편집) == 장종의 치세 == 장종 때 금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삼황오제]]와 [[은나라]], [[주나라]], [[한나라]], [[당나라]]의 역대 군주 17명에 대한 제사를 올렸다. 이것은 금나라가 중원의 한족 왕조들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금나라의 중국화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금나라가 조금만 더 오래갔더라면 남북조 시대의 [[북위]] 등 선비족 왕조들처럼 완전하게 한족에 동화되었을지도 모른다. || [[파일:external/www.guoxue.com/20140408_004.jpg]] || || 장종의 글씨 || [[금세종|세종]] 때부터 이어진 금의 전성기는 장종의 치세까지도 지속되었다. 장종은 서화(書畵)를 모으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고 수금체(瘦金體)[* 이 서체는 [[북송]]의 [[휘종]]이 개발한 것이다.] 등 서예에 매우 능한 문예인이었다. 금나라의 제도 정비도 장종때 완성되었고 문화도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급속한 한화로 인하여 사치 풍조가 만연해졌고 '''정복 왕조 주제에 무(武)를 천시하는 풍조가 생겼다.'''[* [[금세종|세종]] 대정 7년에 [[남송]]의 사신을 맞이하는 연회를 열었을 때 활쏘기 경연을 했는데 남송 사신이 쏜 화살은 과녁에 50발이나 맞았는데 사신을 호위하는 금인들의 화살은 7발만 명중했다.] 장종 재위 후반에 몽골이 준동하기 시작했고 [[황하]]의 제방이 3번이나 터졌다. 재정을 방만하게 운영하여 재위 후반기로 갈수록 재정난이 가중되었다. 장종이 승하한 후 전성기는 끝나고 몽골이 침입하면서 결국 멸망테크를 타게 된다... 원래 금나라 완안씨 황실에는 황후로 맞이할 수 잇는 가문들이 정해져 있었고, 이 가문들 이외 출신 여성들은 황후가 될 수 없었다. 도단(徒單), 당괄(唐括), 포찰(浦察), 나나(拏懶), 복산(僕散), 흘석렬(紇石烈), 오림답(烏林答), 오고론(烏古論), 배만(裴滿)씨 등 여진 귀족 가문 여성들이 황후가 되었는데 장종은 [[한족]]인 이사아(李師兒)를 사랑했다. 심지어 이사아는 평범한 여성이 아니라 죄인의 자식이었다. 금나라에는 전쟁 포로, 혹은 죄인의 자식을 황실의 노비로 삼게 했는데 이사아가 바로 그 케이스. 워낙 아름다운 데다가 다재다능하고 총명하기까지 한 이사아에게 홀딱 반한 장종은 마침 황후가 일찍 죽어 자리가 비어있었기 때문에 이사아를 황후로 책봉하고 싶어했으나 대신들이 완강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황후 책봉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래서 장종은 이사아를 황후 다음 가는 귀비인 원비(元妃)로 책봉할 수밖에 없었다. 장종은 이사아를 황후로 못 들였던 것이 한스러웠는지 그 후 후대 황제들은 민간에서 황후를 들일 것을 명하는 칙조를 내렸고 [[금선종]]은 역시 한족인 왕운, 왕예 자매를 궁중에 불러들여 그중 왕예를 황후로 책봉했다. 비록 이사아는 황후가 되지 못했지만 장종의 사랑을 바탕으로 조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사아의 가족들 역시 그 덕에 벼락 출세를 했고 큰 권세를 누리게 되었으며 이사아와 그녀의 가족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뇌물을 바쳤다. 이사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장종 말엽을 기점으로 뇌물 수수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등 국정이 쇠퇴하는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실제로도 [[개희북벌]]을 단행한 한탁주 역시도 금나라의 쇠퇴를 감지하고 일으킨 것이기도 했다.[* 다만 그럼에도 개희북벌이 실패한 건 근본적으로는 그에 못지않게 남송도 약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