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지영(독립운동가) (문단 편집) === 초년기 === 1887년 4월 22일 한성부 서부 반송방 지하계 교남(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교남동)에서 부친 장은상과 영해 박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4살 때부터 자택에서 한학을 수학했으며 호를 열운(洌雲)이라 정했다. 이것은 '한강 위에 뜬 구름’이란 뜻이다. 그가 훗날 회고한 바에 따르면, 그는 유교를 숭상하는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남들에게 고루하다는 평을 받아왔다고 한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민영환]]이 자결하자, 그는 장례식에 참석했다. 훗날 그는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상여를 청진동에서 모셔나가는데 상행을 보호하기 위하여 앞뒤로 무명줄을 매어가지고 전국 각지에서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붙잡고 갔다. 종로로부터 서소문으로 나가는데 나도 집불(執拂)하는 사람 중에 끼었다.… 상여를 모시고 가던 사람 모두가 통곡을 하였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나는 그 속에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예전엔 완고하고 중국을 사모하는 마음이 두터웠는데, 그것이 변해서 우리는 언제까지나 역사적으로 남의 종노릇밖에 못하느냐?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떠냐? 오늘날 이 지경을 당하지 않았느냐? 하는 생각이 일어났다. 우리도 자주독립을 하여야겠다는 생각이 팽배하여졌다.” >---- >'나라사랑', 제29집(1978년) 당시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한어과 재학생이었던 그는 1906년 졸업한 뒤 한성외국어학교의 부교관으로 재직하면서 [[전덕기]] 목사가 주관하는 상동예배당을 드나들며 [[이회영]], [[이상재]], [[이갑]], [[이준(열사)|이준]], [[안창호]], [[김구]] 등과 교류했다. 특히 그는 [[주시경]]에게 감화되어 그의 문하에서 국어를 전공했다. 장지영은 주시경 문하에서 국어학을 연구하는 동안 신학문을 탐구하기 위해 1908년 이일이 설립한 창동 정리사(精理舍) 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수학을 전공하고 1911년에 졸업했다. 또한 그는 1907년 7월 15일 박동 보성학교 강사가 되어 보성학교 소장이 된 주시경을 보좌했다. 그리고 [[이승훈(1864)|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 선생으로 부임해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쳤다. 그러나 1911년 이승훈이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 암살 음모를 꾸몄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투옥되면서 오산학교가 폐교되자, 장지영은 다시 상동교회 청년학원의 국어와 수학 교사가 되었다. 하지만 상동교회 인사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해외로 망명하자, 그는 [[남궁억]]을 원장으로 모시고 자신은 학감이 되었다. 그러나 1914년 8월 학원이 끝내 폐쇄되자, 그는 결국 이곳을 떠났다. 이보다 한달 앞서 [[주시경]]이 급사하자, 장지영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훗날 '주시경 선생 50주기 추도식'에서 스승의 요절을 애석해하며 통곡했으며, 주시경 회고록을 집필하기도 했다. 한편 장지영은 청년학원 교사로 재직하면서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자활운동에 감명받고 유진태, 임경재, 김덕창 등 동지들과 함께 경제 자립과 문화 독립을 위하여 1912년에 물산장려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간디를 본받아 직접 무명옷을 짜입기로 하고, 고양·통진·김포 등지로 다니며 목화를 모아서 시골 부인들에게 목화실을 뽑게 하고, 이를 덕창직물공장에 가져가 옷감을 짜게 한다. 이듬해, 장지영은 이수삼, 백남일, 조규수, 김정섭, 정범진, 노대규, 이원행, [[오의선]], 홍덕규, 김용철 등과 함께 비밀결사 '흰얼모(白英社)'를 조직했다. 그는 동지들과 혈서로서 동맹을 맺고 만주에 망명한 [[여준(독립운동가)|여준]], [[이동녕]], [[이회영]] 등과 비밀 연락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