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징궈 (문단 편집) === 소련 유학 === 아직 장제스가 친소 성향이었을 때 아버지를 졸라서 [[소련]]에 유학간 경력이 있었다. 장제스는 허락하지 않았지만 장제스의 두 번째 부인이자 장징궈보다 네 살 연상인 천제루(陳潔如, 진결여)가 간청하여 유학을 허락해줬다. 거기서 장징궈는 잘 나갔고 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이 때 같은 중국인 유학생 한 명과 잠시 동거하기도 했는데 그 유학생이 다름아닌 군벌 [[펑위샹]]의 딸이었다. 여담으로 이 때 [[덩샤오핑]]을 만나서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고 덩샤오핑과 형 아우하며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계기로 소련과 관계를 끊자 장제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맹비난하기도 하며 사실상 의절했다.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장제스의 성향 때문에 부자 관계가 최악이기도 했다. >“[[장제스|어머니의 전 남편]]은 [[4.12 상하이 쿠데타|야만적인 방법으로 수십만의 형제와 동포들을 도살했습니다.]] 중국인의 적이며 당신 아들의 적입니다. 듣자 하니 장제스는 효와 예의와 염치를 선전한다고 합니다. 항상 이런 수법으로 인민들을 속이고 우롱했습니다. 어머니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며 2층에서 집어 던지겠다고 길길이 날뛰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할머니에게 야단맞자 버릇없이 대든 사람이 누구입니까?” > >“저는 군벌의 아들에서 한 사람의 공산당원으로 성장했습니다. 장제스는 다섯 차례에 걸쳐 중국의 소비에트 정권을 소멸시키려 했지만 홍군은 중국 인민의 힘을 상징합니다. 현재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란과 죄악의 근원은 장제스입니다. 저의 조국은 소련입니다. 어머니가 중국을 떠날 수만 있다면 계신 곳 어디라도 제가 달려가겠습니다.” - [[프라우다]][* 1955년도에 장징궈는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본인은 소련에 있을 때부터 소련을 신뢰하지 않았다면서 해당 내용을 부정했다. 그러나 가족의 개인적인 일까지 알고 있는 걸로 봐서 본인의 의지로 서술한 게 맞는 것 같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장제스는 유일한 아들에게 이러한 욕설을 듣고도 "소련 놈들이 내 아들에게 내 욕을 시키는 걸 보니 내 아들을 죽이진 않겠구나, 조상님들 뵐 면목이 생겼다."라고 좋아했다는 것이다. 상하이 쿠데타를 통한 공산당 탄압은 자식이 소련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이 중국에 해가 될 것이라며 자식을 잃을 각오로 일으킨 것이고, 장제스는 [[고자]]라 더 자식을 남길 수 없었다. 하지만 장징궈는 얼마 안 가서 대학에서 쫓겨나 수력발전소에서 일해야 했으며 대숙청 당시 [[트로츠키주의]]자라는 혐의로 그 자리마저 잃어버려 보드카에 취하며 부인의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소련은 1931년 [[쑹칭링]]을 통해서 장징궈와 상하이에서 체포된 [[폴란드]] 공산주의자 스파이를 교환하자고 제의했지만 장제스는 국가의 이익을 사사로운 정으로 망칠 수 없다고 거부했다. 결국 동거하던 소련 여자[* 아래에서도 언급할 장팡량(蔣方良)이다.]와 [[1935년]] [[결혼]]했다. 이 시기 [[이오시프 스탈린]]이 직접 강권하여 트로츠키주의를 부인하고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