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징궈 (문단 편집) === 대만에서의 통치 === [[파일:장장모패.jpg]] 1945년 8월 마오쩌둥, 장제스, 미국 대사 [[패트릭 헐리]]와 충칭에서 사진을 찍은 장징궈. 1948년, [[재정경제긴급처분령]]이 내려지자 [[상하이]]에서 부패 척결과 [[화폐개혁]][* 이 화폐개혁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실시된 것이었지만, 근본적인 원인(국민당의 전비지출)을 다스리지 않은 채 단순히 화폐가치를 절상함으로써 위기를 넘기려고 했기 때문에 대실패는 예정되어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정부방침을 충실히 따라 화폐개혁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자기 재산을 신권으로 바꾼 사람들만 거지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로 인해 국민당 정부가 붕괴되었다고 할 만큼 국민당의 경제기반인 저장성-장쑤성-상하이의 민심이반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등을 통해 초[[인플레이션]]을 수습하고자 애썼지만, 방법 자체가 자본가들을 일방적으로 두들겨패는 강압적인 방법이었던지라 상하이 시장 [[우궈전]]을 비롯한 자유파 인사들의 큰 반발을 샀으며, 장징궈를 견제하는 CC계열이나 [[4대가족]]의 일원인 [[쑹메이링]], [[쑹쯔원]], [[쿵샹시]]와의 권력투쟁에 휘말려 실패했다. 그래서 1930년대까지만 해도 쑹메이링과 관계가 나쁘지 않았던 장징궈는 이후로는 죽을 때까지 그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전한다. 실제로 장징궈가 집권하자마자 쑹메이링은 [[미국]]으로 이주한다. 한편 장제스는 믿을 것은 혈육인 장징궈밖에 없다고 여겨 장징궈를 1946년 5월 [[국립정치대학]] 교육장에 임명하는 등 중용하기 시작했다. 1949년 [[국부천대]] 후 장징궈는 정치행동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공안기관을 장악하고 반정부 인사들을 숙청했다. 1950년에는 국방부 총정치부 주임, 국민당 중앙개조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1954년 부총통에 출마하려던 쿵샹시를 낡은 사회의 권세있는 집안 사람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하여 그를 정치판에서 완전히 제거했다. 또한 대만성 정부 주석이자 민주파 지도자였던 [[우궈전]]과의 대립 끝에 [[우궈전 사건]]으로 그를 축출하는데 성공했다. 같은 해 국가안전회의 부비서장에 임명되어 국민당 독재를 위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집권 후의 유화적인 모습과 달리 이 당시의 장징궈는 공포정치의 상징으로, 국민당 통치에 방해되는 인물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고 불법으로 정치자금을 모으는 데 귀재였다.[* 우궈전의 경우, 장징궈가 공산당을 잡겠다는 구실로 공산당의 방식을 사용한다고 비판했다.] 1963년 [[무임소장관]]으로 입각했으며 1965년 1월에는 [[국방장관|국방부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3월 부총통 [[천청]]이 사망하면서 장징궈는 장제스의 후계자로 확정된다. 1969년 [[행정원]] 부원장에 취임하였고, 아버지가 병석에 누운 1972년부터는 행정원장을 맡아 사실상 전권을 장악했다. 1975년 장제스가 사망하자 부총통 [[옌자간]](嚴家淦)이 잠시 총통 자리를 대신한 후, 장징궈는 1978년 [[국민대회]]에서 [[총통]]으로 당선되어 1988년에 죽을 때까지 중화민국 총통으로 있었다. [[파일:attachment/cjg1975.jpg]] 1975년 행정원장 시절. 젊었을 때의 깐죽이 인상은 온데간데없고 중후한 인상으로 탈바꿈했다. 그가 행정원장에 오르기 직전인 1971년에는 중화민국이 [[UN]]에서 [[대만/외교#s-6.1.1|자의반 타의반 탈퇴]]하고 [[올림픽]]에서는 [[중화 타이베이]]가 되는 등 중화민국의 국제적 지위가 점점 하락해가고 있었다. 장제스는 대륙 출신의 인물이었고 중화민국이 지배하는 통일 중국을 정치적 목표로 해왔던 인물이다. 따라서 그에게 [[국부천대]]는 어디까지나 임시 방편이며, 실제로 국부천대 이후 그는 [[중국 공산당]]을 몰아내고 대륙을 통일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렇기에 그는 정작 대만 내정은 방치하다시피 했으며, 1950년대부터 이미 대만이 경제적으로 빠른 성장을 달성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인프라는 일제 시대에서 발전하지 못했다. 정치적으로 [[본성인]]이 탄압받고 [[외성인]]이 우대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대륙 수복은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된데다, 애초에 중화민국 체제를 절대적으로 지지해줄 [[외성인]]의 머릿수는 [[본성인]]에 비해 1/6 정도로 한참 밀렸기 때문에, 이대로는 중화민국이 대륙에서도, 대만에서도, 국제적으로도 외면받아 소멸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화민국이 '대만 사람들([[본성인]])의 지지를 받는 중화민국'이 되어야 했으며, 그렇기에 장징궈는 행정원장 취임 이후로 대만 내정과 [[본성인]] 차별 철폐에 전력을 다했다. 우선 그는 1972년 행정원장이 되고서는 [[국민대회]]와 [[입법원]]의 증액선거(추가 의석에 대한 선거)를 실시했다. 물론 기존 대륙에서 온 국민대회 및 입법원의 의원들을 교체하는 것은 아니고 야당의 참가는 불허했지만, 이로서 [[본성인]]들을 어느 정도 국민당 일당체제 안에 들이는 데는 성공했다. 장징궈는 여기서 더 나아가 본성인들을 국민당에 입당시키거나 당 요직에 기용하는 데도 관심을 가졌으며, 자신의 총통 임기 시절 부총통이었던 셰둥민이나 [[리덩후이]]도 이 과정에서 출세할 수 있었다. 장징궈가 사망할 즈음 국민당에서는 비록 비주류일지언정 본성인들이 적지 않게 되었다. [[파일:external/big5.huaxia.com/392490.jpg]] [[파일:external/lov.vac.gov.tw/224.jpg]] [[파일:external/s2.buzzhand.net/14140369543602.jpg]] 또한 행정원장 시절 주말이 되면 지방 시찰을 자주 나갔는데, [[야구모자]]에 점퍼만 걸쳐 입고 조선 시대의 [[암행어사]] 마냥 시장, 건설 현장, 농촌 등에 가서 지역 주민들과 스스럼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대만 사회의 실상을 직접 익혀나갔다.[* 그는 이미 이 시절부터 당뇨병 증상을 보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싸돌아다니니 주치의가 진절머리를 냈다고 한다.] 더불어 장제스 시절부터 심각했던 부정부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고, 1960 ~ 1970년대에는 '10대 건설'(十大建設)[* 구체적으로는 [[중산고속공로]], 중정 국제 공항(현재의 [[타오위안 국제공항]]), 타이중 항, 쑤아오 항, [[북회선]], [[타이완 철로관리국 서부간선|서부간선]] 전철화, 조선(造船) 공사, 석유 공사, 제1 원자력 발전소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업의 주도면밀한 진행을 통해 고속도로, 철도, 항만, 에너지 시설 등의 사회 간접 자본과 중화학 기간 산업 확충에도 박차를 가하여 대만의 경제를 뒷받침하는 데에 기여했다. 이러한 장징궈의 대만 경제 정책은 좀 더 고도화되기는 했지만, 부친 시절부터의 안정 제일주의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파일:external/www.govbooks.com.tw/4713774403231_01.jpg]] 장징궈의 10대 건설 사업을 소재로 한 보드 게임. 표지에 당시 10대 건설 사업의 내용이 묘사되어 있다. 이들은 지금도 대만 경제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문화 정책에서도 장제스가 중화 문명을 찬양하고, 중국과 다른 대만의 전통 문화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은 것과 달리, 국가가 설립한 문화 시설에서 대만 전통 문화 관련 공연이 개최되는 등 대만의 독자적 문화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국가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통치 방식은 총통에 취임한 이후에도 이어진다. 이를 상징하듯이, 1987년에 본성인 지방 원로들을 [[총통부]]로 초청하여 가진 회담에서 그는 '''제가 대만에 살게 된 지 40년이 되었으니, 저도 대만인입니다. 물론 중국인이기도 합니다.'''(我在台灣住了四十年,是台灣人,當然也是中國人。)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또한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승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인은 권력 세습을 원치 않아서 1984년 제헌절 기념 축사에서 '''"내 후계자는 헌법에 따라 정해질 것이다. 내 가족들 중에 어느 누구도 정권을 잡을 일은 없으며 군부 역시 마찬가지다."'''라는 선언을 했으며[* 사실 장징궈는 세습을 안한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기는 하다. 자녀가 다 혼혈 아니면 사생아라는 점도 이유가 될 수 있다. 아울러 자신의 아들이 세습을 하거나 군부가 집권하게 된다면 대만에서 민주주의는 실현될 수 없는 것이고, 이래서는 날로 국제적 지위가 높아져가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제쳐두고 중화민국을 지지해야 할 명분도 낮아 미국의 지지를 계속 받기가 어려웠다.] 1986년 후계자설이 떠돌던 아들 장샤오우(蔣孝武)를 싱가포르 주재 무역대표부 부대표로 내보내 3대 권력세습의 가능성을 차단했다. 말년에 가서는 3당 훈정[* 강력한 총통제와 3개 정당의 연립 내각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형식적인 헌정(憲政)과 실질적인 훈정(訓政)을 동시에 추구하는 1946년 체제를 가리키는 낱말이다. 1946년에 장제스는 3당 훈정의 막후 공작을 추진하면서 중국 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의 정치인들을 차례로 초청하여 최고위급 관직에 등용을 약속했고, 곧이어 3당 훈정의 여당으로 변신한 중국 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의 정치인들은 연립 내각의 여당으로서 중앙정부의 장차관으로 출세했다.]의 3개 정당[* [[중국 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을 제외한 새로운 정당의 창당이 오래 전부터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진보당]]의 창당을 사실상 묵인하였다. 중국 국민당의 몇몇 강경파 인사들은 '''강제로 해산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며 반발했으나 장징궈가 이를 적극적으로 설득했다고 하며,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중화민국 헌법 준수', '반공 정책 지지', '대만 독립 세력과의 연합 금지'를 지키기만 한다면 다른 정당도 허용할 방침임을 밝히기도 했다.[* 민진당이 대만 독립을 정면으로 내세운 것은 1991년에 대만독립강령을 채택한 이후이다. 그 이전에는 대만 독립을 정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아울러 언론 자유에 대한 통제도 어느 정도 완화하고 [[대만 계엄령|1949년 선포된 계엄령]]을 38년 만인 1987년 7월 전격적으로 해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