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징궈 (문단 편집) === [[양안관계]] 개선을 모색하다 === 1979년 중국이 신년 교서를 통해 무역, 우편, 여행 등의 3개 교류를 전면 실시하자는 이른바 '3통'(三通) 제의를 하자,[* 이 제의는 29년 후 [[마잉주]]가 대만 총통으로 취임한 2008년 말에 실현되었다.] 공식적으로는 본토의 중국 공산 정부와는 정부 차원에서의 접촉, 담판, 타협을 거부한다는 '3불'(三不) 정책으로 응답했다.[* 당시 대만은 미국이 중국과의 수교를 위해 단교하면서 1971년 유엔에서의 축출 이후 악화일로에 있던 국제적 고립이 더욱 가중된 위기 상황이었고, 장징궈를 비롯한 대만 국민당의 지도층 대다수는 여전히 국공 내전 시절 공산당과의 대립을 직접 경험한 이들이었다. 이들에게 중국 공산 정권의 3통 제의는 과거 자신들이 중국 본토에서 밀려나는 단초가 되었던 제2차 국공 합작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고, 이를 단순한 선의로 받아들이기 곤란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선친인 장제스의 무력 본토 수복 노선이 비현실적임을 반영하여 '[[삼민주의]]를 통한 중국 통일'이라는 일종의 평화적 통일 노선을 제시했다. 무력 통일 노선을 공식적으로 버리지는 않았으나, 무력 통일 노선을 주장하던 왕성(王昇) 장군을 [[파라과이]] 대사로 보내는 등 무력 통일을 사실상 포기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아울러 구 국민당 군인들이 본토의 가족, 친척들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이산 가족 상봉, 즉 '탐친'(探親)을 허가했고, 학문이나 예술 등 비정치 분야의 중국 인사들이 대만을 방문하는 것도 용인했다. 이 점에서 장징궈 시대는 초보적이나마 양안관계의 개선이 모색되기 시작한 시기로 평가된다. 앞서 말했다시피 [[덩샤오핑]]과는 한 때 호형호제하며 지냈던 막역한 사이었기에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의 실권을 각각 잡았을 당시 [[싱가포르]]의 [[리콴유]] 총리를 통한 막후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덩샤오핑이 1979년 1월 전격적으로 양안 교류 확대를 선언하고 장징궈가 몇년 뒤 민주진보당 창당을 사실상 묵인한 것과 계엄령을 해제하여 대만의 정치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려 한 것이 서로 연관성이 있었던 것.[* 즉 덩샤오핑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내세우며 상호간의 교류를 강조하자 장징궈 역시 대만의 민주화를 통해 차후 통일 문제에서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자 했던 것이다.] 장징궈는 말년에 정말로 전향적인 양안 관계 개선 정책을 펼쳤고 그가 죽기 전에는 '''국민당, 공산당의 재합당과 통치 체제 통합''' 등이 진지하게 논의될 정도였다. 이에 중국도 전향적으로 나와 '''중화민국의 UN 복귀를 찬성'''하기도 했다. 이 자체는 소련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장징궈가 사망하자 이를 전해들은 덩샤오핑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장징궈가) 너무 일찍 죽었다. 계속 살아있었다면 3차 국공합작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353&aid=0000018192|#]] 그의 사후 [[천안문 6.4 항쟁]]으로 인해 대만에서 중국 공산당에 대한 경계가 강해져 양안 관계는 다시 냉각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