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징야오 (문단 편집) === 호남에서의 통치 === 호남성은 계속된 내전으로 황폐화되어 있었으며 호법군과 대치하는 남부 지역은 우페이푸의 직예군이 점거하고 있어서 장징야오가 장악한 지역은 제한적이었지만 일단 장징야오는 7사단과 11사단을 동원하여 창사, 평강 지역의 요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여기에 1919년 7월, 상남 지역에서 경쟁자 [[청첸]]을 제거한 탄옌카이가 군정부의 명의로 호남독군 겸 상군 총사령에 취임하여 호남성은 1성 2독의 상황이었다. 장징야오의 호남에서의 통치는 억압적이고 반동적이었는데 가는 곳마다 사당을 짓게 하고 총통 선거나 큰 토목공사를 기공할 때마다 점을 쳐서 날짜를 정하였다. 또한 자신이 주둔한 창사에서 마구 재물을 약탈하고 함부로 사람을 죽였으며 성농회, 성공회, 성교육회, 성의회 등에 측근을 심어 어용단체화하고 교육경비를 멋대로 군비로 사용하는가 하면 성의 재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유상은행(裕湘銀行)을 설립, 닥치는대로 지폐를 남발하여 경제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리고 남발된 지폐를 회수한다는 명목으로 호남은행정리처를 설립하여 새롭게 은양 5원권 200만장을 발행하였는데 이를 각현에 할당량을 부과하여 강제 인수하게 하여 막대한 차익을 추구했다. 여기에 호남성 소유의 아연광산을 마구 팔아치우기도 했다. 이 때문에 호남 사람들은 치를 떨며 그를 호랑이, 늑대만큼이나 무서운 '장독'이라고 불렀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중국의 주장이 무시되고 독일령 산동반도를 일본이 먹어치우는 결과가 나오자 분노한 학생들을 중심으로 [[5.4운동]]이 벌어졌는데 호남성의 학생들도 1919년 5월 7일 반일시위를 거행했다. 하지만 장징야오는 군경을 풀어 시위를 가혹하게 탄압하고 해산시켰다. 그리고 호남성의 언론을 탄압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주장하는 등을 하지 못하게 했는데 이때 폐간시킨 신문이 [[마오쩌둥]]이 발간하던 <상강 평론>도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