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장징야오 (문단 편집) === 구장운동과 몰락 === 결국 1919년 말부터 장징야오의 계속된 학정에 분노한 호남성민들이 들고 일어나 호남 각계에서 장징야오를 축출하자는 구장운동이 일어난다. [[5.4운동]]으로 촉발된 분노는 반일 애국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하는 장징야오 정권에 대한 투쟁으로 차차 발전하게 되었다. 1919년 11월, 복건성에서 일본군과 중국인들 사이의 충돌이 있었다는 소식에 12월 2일 창사에서 다시 항일시위가 열렸고 상인들도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벌였다. 이에 장징야오는 자신의 동생이자 참모장 장징탕을 시켜 기마대를 풀어 학생과 상인들의 시위를 진압하고 이들을 토비로 비난하였다. 결국 신민학회와 호남학생연합회가 12월 3일, 긴급회의를 소집, 12월 6일부로 동맹휴업을 선포하고 북양정부에 장징야오 소환을 요구하였다. 구장운동은 호남인들이 거주하던 상하이를 비롯하여 외지에도 퍼져나갔다. 허나 [[돤치루이]]가 장악한 북양정부는 장징야오를 비밀리에 조사하겠다고 입장을 밝힐 뿐 장징야오를 소환하거나 징계하지 않았다. 1920년 5월 16일, 창사에서 호남인민선언문이 발표, 다음과 같이 장징야오를 공격했다. ||장징야오는 병(兵)을 이끌고 호남에 와서 시민, 학생들과 싸우고, 그 악질 측근들이 장사를 누비며 암살과 착취를 일삼았다. 장징야오가 하루라도 빨리 죽지 않으면 우리 호남인은 하루도 살수가 없다. 호남인의 이같은 비참함에 이른 이유를 따져보면 그 원인이 군벌에서 비롯되어 우리 인민을 초래한 것이다. 우리는 자연히 깨닫는다. 호남은 현재와 미래의 호남지역에서 정당한 직업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호남이다. 호남의 일은 마땅히 전체 호남 인민들이 자결해야 하니, 이 자결을 돕는 자는 호남인의 친구이고 이 자결을 방해하는 자는 호남의 원수라고 할 것이다.|| 호남 민중들은 호남에 주둔하던 [[우페이푸]], [[펑위샹]]에게도 도움을 청하였고 이에 안휘군벌과 사이가 좋지 않던 직예군벌들도 구장운동을 지지, 후원하며 장징야오를 간접적으로 압박했다. 5월 25일, 우페이푸가 베이징의 돤치루이와 맞서기 위해 북상을 실시하자 [[탄옌카이]]가 지휘하는 상군이 북상하여 요충지를 차례로 접수했다. 장징야오는 2사단장 오신전(吳新田)과 1사단장 전수훈(田樹勛)을 보내 이들을 저지하려 했지만 오신전은 도주하고 전수훈은 전사하는 등 완전히 패배했다. 결국 장징야오는 6월 11일, 창사를 버리고 악주로 도주했고 6월 12일 상군이 창사를 점령함으로 호남독군직에서 사실상 쫓겨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장징야오의 부하들이 미국 선교사를 살해하여 미 해군 함정이 무력시위를 하는 등 상황은 최악으로 돌아갔다. 탄옌카이는 연성자치론을 주장하며 호남공화국론을 주장하였고 그의 뒤를 이은 [[자오헝티]]가 호남성 헌법을 제정,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연성자치를 실시하게 된다. 호북성으로 달아났던 장징야오는 6월 29일 돤치루이에 의해 해임되고 상하이로 떠나 한동안 그곳에서 지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