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징후이 (문단 편집) === [[직봉전쟁]]과 [[국민혁명]] === 1920년 [[안직전쟁]]이 발발하자 봉천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관내로 진출하여 [[안휘군벌]]과 교전했다. 이후 차하얼 도통, 열하 도통을 지냈으며 1921년 4거두 회의에 참석했다. [[직예군벌]] 23사단장 왕승빈이 [[장쭤린]]을 예방하자 이에 대한 보답으로 바오딩을 방문하여 [[차오쿤]]을 예방했다. 1922년 [[1차 직봉전쟁]]에 앞서 직예군벌을 이길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직예군벌과 화해하자고 했으나 장쭤린은 그의 의견을 무시하였고 전쟁이 발발하였다. 1차 직봉전쟁에서 서로군 총사령관 겸 1부대장에 임명되어 전선에 투입되었다. 장신점 전투에서 호위병들을 이끌고 직접 독전하여 겨우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만 직군의 후방 공격에 포위당할 위기에 처하자 결국 총퇴각 명령을 내렸다. 장징후이는 베이징에 남아 차오쿤에게 죄를 청했고 대총통 [[쉬스창]]은 그에게 안위장군직을 수여했다. 장쭤린이 만주국 보안사령관에 추대된 후 [[쑨원]]과 [[돤치루이]], [[장쭤린]] 사이의 반직삼각동맹 결성을 추진했으며 장쭤린의 봉천군 현대화 작업 중 [[양위팅]], [[장쭤샹]] 등과 함께 동삼성 정무위원에 임명되었다. [[직봉풍전쟁]] 중 [[우페이푸]]에게 파견되어 직봉합작을 추진하였으며 [[옌후이칭]] 내각에서 육군총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하얼빈과 중동철도를 관리하는 동성특구장관으로 흑룡강의 군벌로 군림하였다. 1927년 [[장쭤린]]이 대원수에 취임하자 [[판푸]] 내각 하에서 실업총장, 육군총장에 임명되었으나 1928년 [[황고둔 사건]]에 휘말려 부상을 입었다. 그해 12월, [[동북역치]]가 일어나면서 [[국민정부]]에 귀순하였다. 1929년부터 [[반장전쟁]]이 발발하자 장쭤린과 관내진출 문제를 놓고 긴밀히 협의하였다. 1929년 7월 7일, 장쉐량과 국민정부 외교부장 [[왕정팅]]이 회담한 후 8월 8일, 29차 중국 국민당 상무회의에서 하얼빈 당무특파원에 임명되었다. 1929년, [[중동로 사건]]이 일어나자 중동로 전화국을 소련으로부터 회수하였으며 소련 영사관을 습격해 소련 외교관들을 체포하고 소련이 중국에서 공산화를 기도하고 있었다는 증거를 확보했다. 이후 소련의 침공에 맞서 대소 방비 강화에 나섰으나 [[봉소전쟁]]에서 현대화가 이루어진 소련군에게 개발살이 난다. 1931년 6월, 훈정시기 약법이 반포되면서 국민정부 위원에 선출되었다. 젊어서 [[러일전쟁]]을 겪었기 때문에 일본의 힘을 두려워하였고 이 때문에 [[장쉐량]]의 친영미 노선을 비난하며 일본과 경제상의 공존공영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대외 확장 문제에 있어선 관내 진출을 반대하며 만주를 잘 경영하자는 보경안민을 주장했다. 또한 소련의 동북 지역의 침투와 중국 공산화에 큰 경계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에 맞서기 위해 일본과 협력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1931년 4월, 일본군 육군 참모본부가 책정한 <쇼와 6년도 정세 판단>을 바탕으로 작성된 <만몽문제 해결책>에서 만주 통치를 위해 포섭해야 할 인물로 주목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