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장쭝창 (문단 편집) === [[국민당의 2차 북벌]]과 몰락 ===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 시기에 노남 방어를 맡았으나 [[국민혁명군]]이 북상하자 군기가 형편없던 장쭝창의 군대는 잇달아 패하거나 국민혁명군에게 투항했고 장쭝창은 노모와 첩을 북방으로 피신시킨 다음에 주색잡기를 즐기다가 베이징으로 달아났다. 그가 자랑하던 장갑열차들도 이때 국민혁명군에게 노획되어 파괴되었다. 이때 [[일본 제국]]이 2차 산동파병을 거행, [[제남 사건]]을 일으켜 [[장제스]]의 북상을 저지하면서 장쭝창에게 장제스를 공격할 것을 청했지만 이미 장쭝창의 피해가 너무 누적되어 차려놓은 밥도 먹을 수 없었다. 이후 북벌군이 베이징을 위협하게 되어 장쭤린이 봉천으로 철수하려 하자 항의하며 끝까지 베이징을 사수할 것을 주장했다.[* 만주군벌 장작림에 따르면 장쭤린에게 항의하며 베이징에 남았다고 하지만 장제스 평전에 따르면 봉천으로 가는 기차에 탑승했다고 한다.] 베이징이 함락되자 [[옌시산]]에게 투항 의사를 밝혔으나 거절당했고 톈진에서 각국 외교관들을 위협하며 행패를 부리다가 서원천을 비롯한 부하들이 북벌군에 투항하여 톈진까지 잃자 관외로 철수했다. 이때 그의 부하였던 [[쑨뎬잉]]이 국민당에 투항하는 과정에서 [[동릉 도굴 사건|청황실의 능묘를 대대적으로 도굴]]하기도 하였다. 1928년 [[관동군]]의 고급장교 [[고모토 다이사쿠]]의 음모로 [[황고둔 사건]]이 발생하여 장쭤린이 암살당하자 그의 아들 [[장쉐량]]이 봉천군벌의 수령이 되었는데 장쉐량이 [[중국 국민당]] 합류를 꾀하면서 장쭝창에게 국민정부 합류를 권했다. 1928년 6월 중순, 장쭝창은 저옥박과 함께 장쉐량에게 직로연군을 봉천성에 기반을 마련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장쉐량은 이를 거절했다. [[동북역치]]를 위해 봉천을 방문하고 있던 장제스의 대표 방본인과 바이충시의 대표 하천리가 직로연군을 처리할 것을 요구하면서 장쭝창의 직로연군이 봉천과 국민정부 사이의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양위팅]]은 직로연군을 4개 사단으로 축편하고 관외로 이동시키지 않으면 장쭝창이 난을 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장쉐량은 장쭝창과 저옥박에게 직로연군은 4개 사단으로 줄이는 것은 가능하지만 관외로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알렸는데 장쭝창은 이에 크게 반발해서 자유 행동을 선언했다. 장쉐량은 군대를 축편한 다음에 관외로 이동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장쭝창은 거부하고 장쉐량의 부대를 공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장쉐량은 1928년 8월 25일 총사령부 긴급회의에서 장쭝창 부대는 국민정부의 자유처분에 맡기기로 하면서도 난징에 장쭝창 부대를 협상을 통해 중앙에 귀속시킬 것을 권했으나 바이충시와 하성준은 이를 거절하고 무력 토벌을 주장했다. 이에 1928년 8월 30일 장제스는 장쭝창 토벌령을 하달했고 장쉐량은 [[양위팅]]을 파견하여 [[바이충시]]와 함께 장쭝창을 공동으로 토벌하게 하였다. 결국 장쭝창은 패하여 변장을 하고 어선을 타고 9월 23일 다롄으로 망명했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직로연군은 해체되어 바이충시에게 흡수되었다. 장쉐량은 직로연군 해산은 이들이 중앙에 복종하지 않아 대국을 위해 부득이한 일이었으며 전국 인민이 삼민주의에 복종하는 것이 대세이며 이에 따르지 않는 것은 망국의 죄인이 되는 길이라는 입장을 발표하고 장쭝창에게도 전보를 보내 민의와 보경안민을 위해 부득이 대남타협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후 산동성은 장쭝창의 부하 유진년과 일본 제국이 분할한 상태였으나 일본과 국민정부의 협상이 완료되면서 장제스와 펑위샹이 산동성을 분할하게 되었다. 1930년 [[중원대전]] 이후, 산동성은 장제스에게 투항한 펑위샹의 부하 [[한푸쥐]]가 통치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