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쭝창 (문단 편집) === 말년과 죽음 ===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장쉐량은 장쭝창이 일본에 붙어버릴 것을 염려하여 귀국하여 베이징의 철사자호동에 기거할 것을 청했다. 이를 승낙한 장쭝창은 베이징으로 들어왔는데 아예 산동으로 가서 자신의 옛 부대원들을 소집하여 산동성의 대권을 틀어쥐려고 했다. 당시 산동성을 지배하고 있던 것은 기예노 초비 총지휘 겸 3로군 총지휘 겸 산동성 정부주석 [[한푸쥐]] 였는데 한푸쥐는 1932년 8월, 장쉐량이 소집한 군사회의 중에 [[스여우싼]]의 소개로 장쭝창을 만나 장쭝창, 우학충, 장쉐량과 결의형제를 맺게 되었다. 하지만 장쭝창이 산동성을 장악하기 위한 움직임을 본격화하고 산동으로 내려오려고 하자 장쭝창을 제거하기로 했다. 장쭝창의 산동행에 대해 옛 부하 김수항, 서효루와 장쭝창의 모친 축무파가 모두 반대했으며 옛 맹우인 우페이푸, 쑨촨팡, 장쉐량도 모두 한푸쥐가 장쭝창에게 호의가 전혀 없다는 이유로 만류하였다. 하지만 장쭝창은 듣지 않고 8월 말, 참모장인 김수창과 함께 제남에 도착했다. 장쉐량은 장쭝창이 산동으로 가버렸다는 말을 듣고 9월 2일, 장쭝창의 첩의 명의로 축무파의 병세가 위급하다는 거짓 전보를 보내 장쭝창을 불러들였다. 9월 3일, 장쭝창은 한푸쥐에게 급히 떠나겠다고 말한 후 제남역에서 5시 37분발 기차표를 예매하였다. 오후 5시, 한푸쥐는 산동성 군정요인들에게 제남역에서 장쭝창을 배웅한다는 것을 통지하고 오후 5시에 장쭝창을 배웅했다. 장쭝창이 한푸쥐와 악수하고 기차에 오르려는 순간 산동정부의 부총참의 정계성이 달려들어 장쭝창을 쏘아죽였다. 정계성은 자신이 장쭝창에게 살해된 정금성의 아들이며 부친을 위해 복수하였으니 자수하겠다고 밝혔다. 그가 죽고 나자 그의 첩들은 그의 재산을 모조리 나누어 가졌고 그가 남긴 금고를 열기 위해 부른 열쇠공이 금고 안의 모든 보석을 훔쳐 달아나기도 하였다. 장쭝창이 워낙 악명 높은 인물이었던지라 정계성은 영웅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펑위샹]]은 정계성에 대한 사면을 요청하였다. 이에 국민정부는 정계성에게 특별사면을 내려 무죄석방하였다. 애초에 정계성이 장쭝창을 죽인 것부터 한푸쥐와 스여우싼의 사주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