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쭤린 (문단 편집) == 여담 == 상당히 호탕한 기질을 가졌다고 알려져있다. 1917년에는 자신에게 폭탄을 던진 테러범을 직접 심문했는데, 자신이 장쉰과 손을 잡고 복벽을 노렸기에 중국과 공화주의를 위해 죽이려 했다는 답을 듣자 도리어 그건 오해고 너는 애국자라고 하며 그대로 [[https://www.joongang.co.kr/article/14962388#home|훈방]]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성격을 보여주는 첫 번째 사례로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펑텐군기창(奉天軍械廠)[* 후일 동삼성병공창(東三省兵工廠)으로 개칭되어 일본 제국의 괴뢰국 [[만주국]]의 주요 군수공장이 되었다가 (다른 이름은 묵던(선양의 [[만주어]]식 이름) 조병창(Mukden Arsenal), 일본군이 접수하여 [[관동군]] 야전병기창, 펑텐조병소주식회사 등으로 발전했다. 보통은 선양병공창(沈阳兵工厂)이라고도 불린다.] 설립 초기의 [[https://www.joongang.co.kr/article/14490890#home|일화]]도 있다. 제1차 세계 대전까지 독일 최대의 군수기업이던 [[크루프]]는 [[베르사유 조약]]으로 판로가 막히게 되자 많은 잉여 제작설비를 해외에 수출했다. 중국에서도 판매를 위탁받은 네덜란드 업자가 [[상하이]]의 신문에 판매 광고를 냈다. 장쭤린은 이를 보고 병공창 총판(總辦)이던 한린춘(韓麟春, 한인춘)에게 이 설비를 구입해오라고 거금을 쥐어 그를 상해로 보냈다. 그런데 [[상하이]]에 간 한린춘은 상하이의 화려한 풍경에 넋을 빼앗겨 이 돈을 [[횡령|도박장에서 다 탕진해 버렸다]]. 자금을 다 날린 뒤에 주군의 비용을 탕진한 것에 대해 죄책감과 두려움이 엄습한 한린춘은 자살을 결심하고 다시 동북으로 돌아가 장쭤린에게 “구매 자금을 도박장에서 다 잃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도박의 도를 깨우친 듯합니다. 득도한 선인들의 기분이 어땠을지 짐작이 갑니다. 여한이 없으니 황포강에 투신하겠습니다.”는 내용의 [[유서]]를 보냈고, 이를 받아본 장쭤린은 도리어 “내 부하 중에 득도한 놈이 생겼다”며 포복절도한 뒤 군수처장을 불러다 [[무슨 마약하시길래 이런생각을 했어요?|"돈 백만 원을 줄 테니 한린춘에게 전해라, 절반은 무기 구매, 절반은 도박에 쓰라 하고 절대 강물에 뛰어들지 말라 단단히 일러라"]] 라고 했다. 뜻밖의 처분에 감동한 한린춘은 다시 도박장에 가서 본전의 '''4배를 따고는 손을 턴 뒤, 딴 돈을 한 푼도 남기지 않고 기계 구입에 사용했다고 한다.''' 장쭤린은 그리고 나서 한린춘이 돌아올 때 직접 역에 나가 "너 같은 부하를 둔 게 영광"이라며 엉덩이를 두드려줬다고 한다. 이게 정확히 언제적 일화인지는 불분명하나,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1921년부터 건립된 펑텐군기창은 1928년 완공이 되자 중국 최대 규모의 종합 무기공장으로 발전한다.[* 1930~40년대 전성기에는 생산 노동자가 3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한 번은 자신이 세운 군사학교 생도들을 위해 졸업식 연설문을 작성했는데, 정작 졸업식 당일 날 연단 위에 올라가서 한 마디 꺼내려고 하다가 머리가 새하얘져 버렸다. 더듬대던 장쭤린은 '''"이런 씨발(他妈的), 미안하게 됐다. 누가 멋진 원고를 써 줬는데''' 막상 와 보니 너무 분위기가 진지해서 다 까먹었다." 하더니 연설 대신 연단을 내려와 학생들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면서 "누나 있니?" "몇 살이냐?"하고 물어보며 돌아다니다가 다시 올라와서 즉흥적으로 몇 마디를 했다. "너무 기분이 좋다. 중국의 미래니 뭐니 하는 거창한 건 알 필요 없다. 살려고 아둥바둥하지 마라. 천하의 주인은 너희들이다. 공을 세우면 상을 주겠다. 내 일가친척들이 날 믿고 까불면 두들겨 패라. 그런 것들은 때려죽여도 되니 보고할 필요도 없다. 내 자식들도 마찬가지다."[* 절대 농담으로 가볍게 한 말이 아니다. 자기 셋째 부인의 동생마저도 거리에서 난동을 부리자 본보기로 총살해버렸고, 절망한 셋째 부인은 출가했다가 상심한 나머지 요절했다.] 그리고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해라. 뭐든 다 주겠다."라면서 한 마디 하고 연단을 내려오다가 뭔가 생각난 듯 다시 연단으로 올라가서 한 마디 덧붙였다. "잠깐, 뭐든 다 주겠다고 했는데 그 말은 취소다. '''내 여자들은 안 된다. 달라고 하지 마라."''' 이 말로 듣고 있던 생도들의 배꼽을 날려 버렸다고 한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14430787|#]] 1927년, [[군대]]를 이끌고 [[소련]] 대사관을 공격해 [[중국공산당]]을 설립한 [[리다자오]]를 붙잡아 처형했다. 그를 암살했던 [[고모토 다이사쿠]]의 운명은 이후 기구했는데 나중에 [[중일전쟁]]에 참여했다가 일본이 패배하면서 산시왕 [[옌시산]]의 수하가 되어 그에게 협조했다. 이후 옌시산이 패하여 광저우로 달아나자 그는 공산당의 포로가 되었다. 공산당은 그를 전향시키려 했으나 고토모 다이사쿠는 전향을 거부했고 황고둔에서 장쭤린을 암살한 것이 국가를 위한 대의였다고 끝까지 정신승리를 하다가 중화인민공화국의 감옥에서 옥사했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소속을 계속 갈아타면서 살아남은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단순한 기회주의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위의 도박꾼 에피소드나 자신을 믿고 까불면 자식, 친지라도 가차없이 처벌하라는 말처럼 사람을 보는 눈이 비상했고 인사에 대한 원칙이 철저했는데, 린위린(任毓麟)을 자신의 비서실장으로 채용해서 다년간 일을 맡겼지만, 정작 장쭤린은 1924년 베이징에 입성한 이후 3년 동안 여덟 번을 개각하면서 린위린을 한 번도 지명하지 않았다. 막료들이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그는 [[예스맨|8년간 내 옆을 따라다니며 비서로 일하면서도 한번도 내가 시키는 일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낸 적도 없고 의심한 적도 없다.''' 그저 '네, 네' 하면서 따르기만 했을 뿐이지.]] 이런 사람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나?"[[https://kknews.cc/history/x39j95q.html|#]]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