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쭤린/생애 (문단 편집) === 혁명당원 장룽 살해 === ||[[파일:external/images.ccoo.cn/201111714184323.jpg]] || || 장룽 || 장쭤린이라는 군사력을 가지게 된 자오얼쉰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는 신군부 장령 등을 압박해서 보경안민(保境安民)이라는 주장을 제기, 통과시키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이 주장은 혁명에 반대하고 계속해서 황제 체제를 유지하다는 전형적인 보황(保皇) 노선이다. 그리고 장쭤린이 그 앞잡이로 활약했다. 하지만 이미 전국이 혁명의 기운으로 불타오르는데, 저런 짓을 한다고 해서 혁명의 기세를 막기는 힘들었다. 봉천의 혁명당원들은 시내에 모여 우창 봉기(武昌 蜂起)에 어떤 방식으로 호응할까 논의했다. 격렬한 논쟁 끝에 평화적인 방법을 이용하기로 하고 란톈웨이, [[우징롄]] 등의 혁명당 수령은 손에 피 한방울 묻히지 않고 동북 정권을 탈취할 계획을 세웠다. 우징롄은 봉천성 자의국 의장 명의로 성내 각계 인사들에게 회의를 소집하고, 혁명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자고 했다. 혁명파가 세운 계획은 치안 유지의 명목으로 봉천성 보안회를 조직한 뒤, 청나라 조정에서 임명한 총독 자오얼쉰을 내쫒고 혁명파 신군부 란톈웨이를 관외도독으로 추천, 우징롄을 봉천성 민정장(民政長)으로 추대하여 독립을 선포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북의 군대를 이끌고 관외로 진입, 혁명을 돕자는 계획이었다. 뭔가 굉장히 허술하고, 고생은 덜하면서도 요행수를 바라는 작전이었지만 그 당시 경험 없는 미숙한 혁명당원들은 이 정도가 한계였다. 앞서 말한 우징롄은 봉천교육회 회장, 봉천 자의국 의원 등을 지냈으며 곧 자의국 의장까지 되었다. 그래서 이런 명목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있었던 것. 그는 진보적 사상을 갖추고 있었고, 일을 처리하기 위하여 1911년 12월 12일 보안회의를 소집했다. 참여한 사람은 각계 인사 200여 명이었다. 물론 자오얼쉰도 장쭤린을 대동하고 회의에 참석했다. 물론 노회한 정치가인 자오얼쉰이 아무 생각 없이 나간 것은 아니다. 그는 장쭤린에게 명령해서 회의장 주변에 총을 든 요원들을 쫙 깔아놨다. 압력을 주는 것이다. 물론 장쭤린 본인도 권총을 들고 회의에 참석했는데, 얼굴에 살기가 충만했다고 한다. 당연히 회의장은 회의는 커녕 살벌한 모습에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기세등등한 젊은 혁명당원들은 겁을 먹기는커녕 자신들의 주장을 폈다. > "청조에서 독립해서, 자치 기구를 세우고 독립합시다!" 자오얼쉰은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 "나는 당신들이 문제를 논의하자고 하기에 왔는데, 뭐? 자치? 독립? 그게 그렇게 쉽게 될 수 있는 건가!" > > "독립을 선포하시오!" 사방에서 혁명당원들이 자오얼쉰에게 독립을 요구하던 바로 이때, 자오얼쉰을 수행하던 장쭤린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튀어나왔다. 그는 권총을 들고 탁자를 총으로 탕탕 내려치며 흉신악살 같은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 "나 장쭤린은 군인이다! 오로지 총독 각하를 보호할 뿐이다, 이 말이다! 불평을 계속 늘어놓는다면, 비록 어제의 동지라고 해도 이 총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지!" 동시에 회의장 주변에 있던 장쭤린의 부하들이 모두 권총을 빼들었다. 이런 마당에 회의가 지속될 리가 없었다. 혁명당원들은 분기탱천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고, 그들을 지지하는 의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회의장은 보황파 세력밖에는 남지 않았다. 회의 안건도 자연히 자오얼쉰의 뜻대로 되어 국민 보안공회가 만들어졌는데, 말이 보안공회지 보황 단체나 다를 바 없었다. 물론 자오얼쉰은 실권을 그대로 지켰다. 혁명파가 보황파에 제대로 얻어 맞은 사건이었다. 다음날인 12월 13일. 자오얼쉰은 란톈웨이 협통(協統 : 여단장)을 어떻게 요리할까 고민했다. 전날의 회의에서 혁명파가 혁명 사상을 가진 -그리고 쑨원의 동맹회 회원이기도 한- 란톈웨이를 관외도독으로 밀려고 했다가 자오얼쉰에게 저지당했는데, 언제 또 다른 수작을 부릴지 모르므로 그들의 군사력을 모두 빼앗아야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인물인 [[베이징]]의 위안스카이에게 전보를 쳤다. || [[파일:external/www.dl.net.cn/201007131038567284.jpg]] || || '''[[위안스카이]]''' || > "서루칭(攝汝淸, 섭여청)에게 동북 2혼성군의 협통직을 잠시 겸직하게 하여 봉천에 주둔시키고 치안을 담당하게 해 주십시오." 이 전보는 사실상 모든 군사적 실권을 서루칭에게 주자는 것이었다. 서루칭은 전형적인 구식 군인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자오얼쉰의 충식한 수하였다. 위안스카이가 이를 승낙하면서 자오얼쉰은 혁명파 란톈웨이의 권한을 모두 빼앗아 버렸다. 그리고 그를 불러서 점잖게 말했다. > "란톈웨이 협통이 뜻이 크고 식견이 높은 분이라는 것이야 유명하지요. 그래서 이번에 동남의 각 성을 돌아보시도록 하고, 우리의 실정을 널리 알리고 여론을 청취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새로 출발하는 봉천 보안공회가 국민의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는 취지도 널리 알렸으면 합니다. 때문에 협통의 자리는 잠시 맡겨 두고 서둘러 출발하도록 하시고 수시로 보고를 해 주십시오." 실로 교활한 계략이었다. 자오얼쉰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란톈웨이를 치울 수 있었는데, 정작 외부에서 보면 (산해)관외에 있는 사람을 관내로 보내는 것이니, 란톈웨이는 아주 중요한 일을 맡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관외, 그러니까 봉천성의 혁명파들은 자신들의 혁명 지도자를 손도 못 쓰고 잃게 되었다. 장쭤린이 모시는 인물은 그만큼이나 교활했다. 이렇게 충돌하는 과정에서 장쭤린은 란톈웨이의 무장을 직접 해제시키려고 하는 등 은근히 협박을 가했다. 란톈웨이를 처리했으니, 다음은 장룽 차례였다. 장룽은 북경에서 러시아어를 배우다 러일전쟁이 일어난 직후 봉천으로 들어와, 관동자위독립군을 조직하고 비밀리 간행물을 발간하여 혁명을 고취시켰다. 그러다가 일본으로 도망갔고, 그 유명한 혁명가 [[황싱]](黃興, 황흥)과 함께 혁명 활동을 했다. 1910년에 귀국한 뒤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봉천에서도 혁명을 준비하며 조직을 만들고, 군민을 포섭했는데 그 숫자가 1만이 넘어 기세가 대단했다. 그들의 목적은 무장봉기였다. 이 과정에서 장룽은 위안진카이(袁金凱, 원금개)라는 사람에게 할말 못할 말을 다 했으나, 사실 위안진카이는 자오얼쉰의 사람이었다. 또한 자오얼쉰은 장쭤린을 장룽과 친구가 되게 했다. 따라서 이 계획은 줄줄이 자오얼쉰의 귀에 들어갔고, 이제 선수를 칠 차례였다. 1912년 1월 23일. 위안진카이는 장쭤린과 장룽을 불러 조촐한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서글서글한 장룽은 무서운 음모를 깨닫지 못했고, 한참 식사를 하던 중에 위안진카이는 문득 장쭤린에게 말했다. > "먼저 일어나시겠습니까?" > > "그러지요." 이것이 계획을 실행하자는 신호로, 장쭤린은 먼저 일어나 부하들을 불러 준비를 시켰다. 맛있게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던 장룽은 괴한들(은 훼이크고 장쭤린의 부하들)의 총격을 받아 반항도 못해보고 현장에서 즉사했다.~~최후의 만찬~~ 그렇게 장룽은 28세라는 나이에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장룽이 죽고 난 후 그 피가 마르기도 전에 장쭤린은 패거리를 이끌고 장룽의 집을 수색하는 한편, 장룽의 조수와 혁명당원 등 100여 명을 처형했다. 성내는 공포에 떨었고, 자오얼쉰은 "통령의 직분을 지키고 악질분자를 처단하여 민심을 빠르게 진정시켰다. 그대의 행위는 표창을 받을 만하다."며 그를 치하했다. 장쭤린은 그 대가로 사단장급의 자리에 오르지만, 아직 사단장은 아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