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태완 (문단 편집) === [[12.12 군사반란]]과 진압시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10120703115115.jpg|width=100%]]}}} || || [[10.26 사태]] 후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된 장태완 [[소장(계급)|소장]](맨 오른쪽 하얀 컵을 들고 있는 사람)이 부임 나흘만인 79년 11월 20일 [[청와대]]를 지키는 근위부대인 [[수도방위사령부|수도경비사령부]] [[제33경비단]]을 초도순시, 단장인 [[김진영(군인)|김진영]] [[대령]]으로부터 부대현황을 브리핑받고 있다.[br]그리고 이 사진이 촬영되고 3주 후, [[12.12 군사반란|브리핑을 하던 김 대령이 브리핑을 받던 장 소장을 배신한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HMTQTsPNWYg, start=600)]}}} || [[월간조선]] 1995년 9월호 부록으로 실린 육성테이프 녹음본. 10분 8초부터 장태완의 [[육성]]이 나온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12.12 군사반란]] 당시 [[서울특별시|서울]]에 있던 부대 중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육군헌병감, 비록 국방부 명으로 회군한 윤흥기 9공수여단장과 함께 [[쿠데타]]에 끝까지 저항한 군인이다. 전두환의 간계에 의해 동료 장군 한명과 연희동에 있는 요정(고급 술집)으로 초대받아 가볍게 술 몇 잔 기울이던 중,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신군부 쿠데타에 불법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하며 수도경비사령부로 급히 달려간다.[* 본인 수기에 따르면, 이때 차를 타고 가는 와중 곰곰이 생각해보니 '국가적 혼란기에 박정희 사조직들이 최규하 대통령이 아직 군을 전혀 장악하지 못한 차제에 전군의 총 군령권자이고 계엄총사령관인 총장님을 제거함으로써 정권을 장악하려는 목적으로 일으킨 쿠데타임이 거의 틀림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와중 자기와 차에 동승한 [[조홍(군인)|조흥]] 헌병단장에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하고 떠봤더니, 그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북괴 간첩 소행이 아니겠습니까?" 하며 딴청을 부렸는데 항목에도 있지만 조흥은 이미 반란군 세력에 가담한 상태였다. (차가 수경사에 도착하자마자 반란군쪽으로 달아난다.) 당일 장태완을 만취케 하여 지휘 체계를 무력화시키는 임무를 맡았다고 하는데 일단은 실패한 셈. 또 연희동을 나서며 무슨 일이냐고 묻는 정병주 특전사령관에게 대뜸 "여보, 정선배! 오늘 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배신하지 않을래요?" 하니 "이게 무슨 소리야? 생명을 같이하자!" 하고 장태완 손을 꽉 잡아 쥐는데 순간적으로 육감을 통해 크게 안심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부대에 도착했을 때에는 사전에 치밀하게 작당한 대로 움직인 반란군에 의해 상황은 매우 안 좋았고 전황은 신군부가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던 중이었다. 기선을 잡고 득의양양하여 자신마저 회유하려 드는 신군부 측에[* 물론 장태완도 정승화 총장만 원위치로 보내주면 없었던 일로 처리하고 언론에도 퍼지지 않도록 하겠다고 신군부를 상대로 회유 시도를 하기도 했다.] > '''마, 너거한테 선전포고다 인마! 난 죽기로 결심한 놈이야!''' 라고 일갈하고 반란군인 신군부를 제압하기 위해 전황을 어떻게든 뒤집으려 한다. 실제로 반란군에게 전화통화로 한 말이며 절대 후대의 윤색이 아니다.[* 밑에 보면 알겠지만 신군부 측을 가리켜 "반란군 놈의 새끼"라고 말하며 "전차 몰고 날려버리겠다"는 것도 수기에 있는 내용인 "이 반란군놈의 새끼야! 너희놈들 거기 그대로 있거라! 내가 전차를 몰고 가서 싹 깔아 죽일테니!"에서 조금 자극적으로 바꾼 것 뿐이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forcejang.jpg|width=100%]]}}} || 2010년 7월 27일 [[SBS]] <8시 뉴스>의 보도자료 * [[http://cfile27.uf.tistory.com/original/174C58274B22C9511FAFC7|12.12 쿠데타 당시 육성]] * [[http://cfile228.uf.daum.net/image/1454C41C4BF15DF64E6ED1|이 이미지의 8번이 음성 기록]] * [[http://blog.daum.net/gojin4/16185970|출처는 여기]] 물론 말만 저렇게 늘어놓지 않았고 실제로 반란군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관저에 즉각 경비 병력을 보내 구출을 시도하는 한편 [[대한민국 육군본부]]에서 피난 온 육군 수뇌부와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과 함께 작전을 논의, 30경비단은 이미 반란군 수뇌부의 베이스가 되었기에 그나마 운용이 가능한 33경비단의 전차 중대를 기습적으로 보내 [[경복궁]]에 모여 있던 반란군 일당을 쓸어 보려고 하기도 하였다.[* 하필이면 주력 전차를 동원할 수 있는 수도경비사령부 30, 33경비단장이 [[장세동]], [[김진영(군인)|김진영]]으로 당시 모두 반란에 가담해 있었고, 33경비단은 사령관 명에 따라 경복궁으로 향하던 도중 부대장인 김진영이 오해가 있을 것이라며(...) 필사적으로 입을 놀린 끝에 이에 낚인 전차부대가 회군하면서 9공수 회군과 함께 진압군에게 가장 안타까운 순간으로 꼽히게 된다.] 장태완은 정병주 특전사령관에게 전화하여 "시간이 촉박하니 9공수라도 빨리 반란군 수뇌부들을 공격해야 된다"라고 했고,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진압군의 사실상 유일한 희망이던 9공수에게 "반란군 본거지인 30경비단과 보안사를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신군부는 당황했는데 1공수, 3공수 등 반란 [[공수부대]]보다 9공수가 교통요건이 더 좋아 서울에 더 가까이 있어서 이를 가만히 둘 시 본거지에 들이닥쳐 자신들의 반란은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태완은 포병대와 연락해서 30경비단과 보안사에 포를 겨누고 명령이 오면 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진압군 수뇌부는 너무 순진했는지 최대 실책을 저지른다. '반란군부가 1, 3공수 회군시킬테니 진압군도 9공수를 회군시키자'라는 일명 '신사 협정'을 체결하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자신들을 칠 수 있던 유일한 군부대였던 9공수가 본대로 되돌아가자 하나회는 안도의 한숨[* [[노태우]]는 이 당시 9공수가 신사협정을 믿지 않고 보안사와 30경비단에 들이닥칠때를 대비해 [[권총]]에 실탄을 장전해두고 유사시에 [[자결]]하려 했다고 한다.]을 내쉬면서 협정을 지키지 않고 바로 1공수로 하여금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와 [[대한민국 육군본부|육군본부]]를 점령하라고 지시, 3공수로 하여금 특전사령부를 공격해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라고 명령한다. 육군본부와 국방부는 1공수,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3공수에게 체포당했다.[* 정병주 사령관은 전두환이 1공수 여단장할 때에도 특전사령관이었으며 1공수 여단장 [[박희도]]는 1978년 1공수 위수 지역에 [[무장공비]]가 돌아다니다가 귀환한 사건으로 보직해임 될뻔 한 것을 육군참모총장에게 정병주 사령관이 빌어서 자리를 보전했음에도 이때 무참하게 체포하였다.]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은 정병주 사령관을 지키려고 처절하게 응사했지만 반란군의 총격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때 신군부에 붙은 [[박종규(1944)|박종규]] 중령측은 김오랑 소령과 가족끼리 모임도 가질 정도로 친한 사이였는데, 결국 자신의 명령으로 김오랑 소령이 죽임을 당하게 된다. 민주화 이후 하나회가 숙청되면서 본인도 군복이 벗겨지고 반란군이 되면서 예비역 소장에게 주어지는 예우와 군인연금도 박탈당하고 가난한 삶을 살다가 죽게 되는데, 김오랑을 사살한 것에 대해 죄책감이 있었는지 말년에는 김오랑기업사념회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몰락과 병고는 천벌'이라며 자책하고 죽었다.] 이렇게 그나마 남은 우군이었던 육본과 국방부도 점령 당하고 특전사령부까지 반란군 손아귀에 떨어지면서 진압군 거점은 수경사만 남게 된다.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마지막 수단으로 행정병, 취사병, 자기 휘하에 있는 극소수 전투병 등을 합한 100여명과 남은 전차 중대 4대를 소집하고 보안사를 직접 공격하려고 한다. 그러나 전차부대마저 배신하면 병사들이 다 죽는다는 장교들의 설득, 하나회의 도청, 반란군에게 항복한 국방장관 [[노재현]]의 사실상 백기투항하라는 지시, 최후로는 하나회 출신이자 헌병단 부단장인 신윤희 중령이 헌병단을 접수하고 수경사 수뇌부에 들이닥치자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더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체감하여 자기 사령관실로 들어간 후 자신의 부하이자 배신자인 신윤희에 의해 곧 체포된다. [[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39922|12·12 당시 장태완 장군 육필 수기]]. 일각에선 이걸 가지고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을 패장이라 폄하하는 이들도 있는데, 당시 상황을 제대로 안다면 이보다 무식한 소리가 없다.[[https://youtu.be/RbgfqrBJWDA?t=950|증언]] 일단 당시 수경사 내부 통화는 보안사에 의해 감청되고 있었으며 수경사 헌병단과 핵심 전투 병력인 30, 33경비단을 맡은 장세동과 김진영이 쿠데타의 주축이었다.[* 사실 30, 33경비단은 수경사 배속이었으나 [[청와대]] 인근을 방위하였기에 [[대통령경호처장|대통령경호실장]]이었던 [[차지철]]이 오랜 기간 자신의 직속 라인으로 지휘하고 있었다. (전두환은 한때 차지철 밑에서 경호차장보를 했었고 뒤를 이은 것이 [[노태우]]였다.) 따라서 12.12 군사반란 시기에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이 주력 부대들을 장악하지 못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였다.] 수경사 내에서 회유당하지 않은 부대는 비전투 부대인 포병단과 방공포병단 뿐이었다.[* 황동환 수경사 방공포병단장과 구명회 수경사 야포단장은 모두 비 육사출신이다. 역시 쿠데타군에 맞선 수경사 작전참모 박동원 대령이나 33경비단 작전주임 김달연 소령도 마찬가지. 실제 포병단에서는 하나회 장성들이 모여있던 수경사 30경비단으로 포를 조준한채 명령만 내려지면 바로 발사할 준비 태세를 갖췄다고 한다. 다만 30경비단이 경복궁에 위치해 있어 문화재 훼손 우려가 있었으며 청와대, 총리공관 및 [[효자동(종로구)|효자동]] 등 주택 밀집 지역 인근이라 실제 명령을 실행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30경비단 내의 초급 장교, 부사관, 사병 등 죄없는 직속 부하들의 피해도 부담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하나회는 자신들의 세력인 30, 33경비단을 통하여 [[최규하]] 대통령대행을 잡고 있었다. 계엄사령관이 어디로 잡혀갔는지 모르고 그 위에 국방장관은 어느 순간 사라졌는데 [[대한민국 국군|국군]] 통수권 대행자가 있는 곳에 포격을 시행한다는 것이 사실 불가능하다.] 인근에 유사시 수경사령관이 자신의 휘하로 배속받을 수 있었기에 가장 먼저 찾았던 [[수도기계화보병사단]]과 [[제26기계화보병사단]]은 출동 준비 명령은 받았으나 국방장관 노재현의 출동 명령이 떨어지지 않아 출동하지 못했고 종국에는 보안사와 하나회의 공작에 넘어가 출동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수도기계화보병사단 포병연대장 김도수는 쿠데타에 적극 가담해 경춘국도 다리목에 바리케이트를 세워놓고 있었기에 출동했으면 같은 사단 병력들끼리 싸울 판이었으며 사단장 손길남이 출동 명령을 내리면 바로 사살하기 위해 사단장실 앞에 장교들이 권총에 장전하고 대기했다고 한다. 제26기계화보병사단은 사단장 배정도가 제26기계화보병사단 담당 보안부대장 김현과 술 마시다 퍼질러 자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수도기계화보병사단과 제26기계화보병사단이 수경사에 배속하였다고 하더라도 당장에 반란군을 진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공수여단은 시가전 특화 부대들로 이들을 상대로 보병사단이 이긴다는 것이 쉽지 않고 서울 도심에서 싸울 수는 없다. 이 부대들을 방어용으로 사용하고 반란군에 통제를 받지 않는 9공수를 통하여서 보안사나 30경비단을 터는 것만이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실제로도 반란군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것은 오직 9공수의 서울 이동이었다.] 반란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서울로 출동하여 [[부천IC]]까지 다다랐던 제9공수특전여단[* 제9공수여단장 윤흥기 준장은 갑종(35기) 출신으로 1980년 5월 전투교육사령관 겸 전라남북도 계엄분소장으로 전두환의 [[광주광역시|광주]] 진압 요구에 미온적이었다는 이유로 밀려난 윤흥정 장군의 동생이다.]은 전두환 측의 신사 협정 제안에 속은 진압군 측 최고 지휘관인 육군참모차장 윤성민 중장의 회군 명령에 의해 주둔지로 원대복귀 당했다.[* 당시 상황에서 진압군의 거의 유일한 정예 병력으로 이들을 통하여서 보안사를 타격하고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구출할 수 있었다면 상황이 반전되었을 것이다. 당시는 계엄 상황이었기에 반드시 계엄사령관의 지시를 받아야 하며 이를 듣지 않는다면 무조건 반란군으로 즉결 처분 대상이다.] 그 외 1, 3, 5공수여단은 쿠데타군의 주축이었고 [[제9보병사단]]과 [[제20기계화보병사단]]도 사단장이 노태우와 박준병이니 말할 필요도 없다.[* 제9보병사단장 노태우는 제1공수여단의 서울 진입에 발맞춰 제9보병사단 29, 30연대에게 서울로 진입할 것을 지시하였다. 하나회 소속인 참모장 구창회는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했는데 30연대를 맡고 있던 非 하나회 김봉규 대령은 [[이건영]] 제3야전군 사령관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으나 29연대장 [[이필섭]]은 군말없이 명령에 따랐다. 결국 29연대와 30연대 1개 대대 병력이 [[군사분계선|휴전선]]을 버리고 쿠데타에 동원된다.] [[제2기갑여단]]은 여단장 이상규[* 육사 12기 하나회]가 이건영 3군사령관의 병력 출동 금지 지시를 무시하고 예하 16대대를 출동시켜 쿠데타에 합류했다. [[제11기계화보병사단]]은 국방장관 명령이 없어 출동하지 못했으며 [[제30기계화보병사단]]은 사단장 非 하나회 박희모가 보안사에 협력하여 행주대교를 차단하고 구파발 검문소의 병력을 증강하여 제1공수여단의 서울 진입을 저지하라는 육군본부 정식 명령을 무시하고 길을 열어줬을 뿐 아니라 90연대를 쿠데타에 합류시키는 등 한마디로 [[사면초가]]였다. 서울을 방위하는 수경사 인근에 수도권 중 서북부([[고양시|고양]]~[[파주시|파주]] 일대)의 방위를 담당하고 상비 사단만 3~4개(1, 9, 25, 30사단)를 가지고 있는 1군단의 군단장이 12.12 군사반란 때 경복궁에 있던 황영시였고 서남부([[인천광역시|인천]] 및 일대 도서 지역 포함)의 방위를 담당하는 수도군단장이 함께 있던 차규헌이였다. 수경사령관으로 부임한지 겨우 24일째였던 장태완은 그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해 한강 이남에 있던 야포단을 도강시키려 시도하였으나 제1공수여단이 행주대교를 장악하여 여의치 않게 되자[* 먼저 제1한강교로 향했으나 막혀서 행주대교로 갔지만 제30기계화보병사단이 열어준 길로 들어온 제1공수여단에게 장악된 뒤였다.] 사령부 행정병과 취사병들까지 긁어모아 맞서보려 했다. 그러나 취사병과 행정병을 합쳐도 100여 명이었고 김진영이 수경사 전차대대장 차기준 중령이 보낸 33경비단의 전차 1개 중대를 도로 회군시켜버려 사령부 내에 있던 전차 4대가 기갑 전력의 전부였다. 즉, 현실적인 진압 방법이 없었고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을 믿고 따라준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치욕을 감내한 것이다. 만약 거기서 싸우기로 했다면 보안사에 의해 수경사 통화가 모두 감청당하는 상태에서 9사단 29연대, 30연대 1개 대대, 30사단 90연대, 1, 3, 5 공수여단, 2기갑여단 16대대, 수경사 30, 33경비단을 비전투 병력 100여 명으로 상대하는 그림이 나오는데 이건 개죽음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경기도]] 서남부 방위를 담당하는 수도군단 내에 부대들은 따로 움직이지는 않았으나 군단장이 경복궁에 가서 하나회 후배들 옆에 앉아 있었다. 죽기 살기로 싸운다면 수도군단을 움직일 수도 있는 일이였다.] 물론 야포단을 동원하면 반란군 수뇌부가 몰려있던 30 경비단을 타격하는 일은 가능했으나, 문제는 그 30단이 있는 곳이 민간인들도 많은 경복궁 일대였다. 이때나 그 후에나 국민의 안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쿠데타 세력과 달리 장태완은 서울 시민들의 안전도 신경써야 해서 몇 안되는 중화기 사용까지 제한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장태완 장군이 동원할 수 있던 화력이 전차 4대, 토우 중대, 3.5인치 로켓포, 106미리 무반동총인데 작전참모 박동원 대령은 장애물이 많은 시가지에서 사용할 경우 유도선이 끊어져 엉뚱한 곳에 떨어질 수 있다며 토우 중대 투입을 반대했다. 박동원 대령은 대신 야포단을 동원해 쿠데타 수뇌부가 모인 경복궁을 타격하자는 의견을 내놓았으나 야포병단장 구명회 대령은 "타격을 위해선 관측 사격을 실시해야 하는데 그럼 시가지가 쑥대밭이 된다"며 반대하고 조명탄만 꺼내두었다. 그나마도 조명탄 추진체가 민가에 떨어질 가능성이 있어 꺼내놓기만 하고 장전을 못 했다.] 이쯤되면 설사 9공수 병력이 중도에 부대로 복귀하지 않았어도 반란군 진압이 가능했을까 싶은 상황이다.[* 물론 9공수가 먼저 서울에 도착해 30단에 모여있던 반란군 수뇌부를 진압하거나 부대 감청 중인 보안사를 접수하고 납치된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구출만 했다면 진압이 불가능한건 아니었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을 잡고 있고 노재현 국방장관이 하나회 편을 들어도 일단 계엄 상황에서 모든 부대는 계엄사령관의 통제를 받아야 하기 때문. 이를 방해할 보안사 본부가 타격을 받고 계엄사령관이 하나회가 아닌 부대들에 명령을 내린다면 사실상 겜은 끝나는 것으로, 반란군들 입장에선 진압군이 도착하기 전 시간 싸움만 남을 뿐인데 그러면 9공수와 서울 한복판 도심에서 유혈 사태를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당연히 이 수준까지 가면 누가 뭐라고 해도 계엄사령관이 명분을 쥐고 있기 때문에 민간에서도 가만 있지 않는다.] 비판받아야 할 대상은 당연하지만 군인의 의무를 저버리고 반란에 가담한 '''[[신군부]] 장교들''', 그리고 '''[[대한민국 국방부장관|국방장관]] [[노재현]]'''이다. 특히 이 양반은 [[한남동]] 공관 근처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인근의 [[단국대학교]] 서울캠퍼스[* 2007년 [[용인시]] 죽전으로 이전했다. 현재는 [[한남더힐]]이 자리잡고 있다.]로 [[빤쓰런]] 쳐버리던 걸 겨우 잡아서 육본 벙커로 끌고 왔더니만 부대 출동 명령을 내리기는커녕 어떻게든 진압해 보려던 장태완 소장에게 말로 하라며 [[적반하장]] 격으로 윽박질렀던 양반이다. 노재현이 도망가는 대신 신속하게 [[수기사단]], [[26사단]], [[9공수]], [[11사단]]을 출동시켜 장태완에게 딸려줬으면 이 사달은 나지 않았을 것이다. [* 그렇게만 되었다면 반란진압이 가능했을 것이다.] 결국 반란에 성공한 신군부에게 [[체포]]된 이후 [[서빙고]]에서 45일 간의 조사를 받았다. 장태완은 서빙고 분실에 들어서자 마자 이곳이 그 악명높은 빙고 호텔이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보안사 수사관이 입고 있던 육군 전투복을 벗고 수감자들에게 지급된 부착물 없는 육군 사병용 민무늬 전투복으로 갈아입으라고 해서 갈아입은 뒤 수사를 받았는데, 수사관이 옆방에 [[김재규]]와 [[정승화]]가 갇혀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나마 장태완은 감금 및 조사를 받았어도 옆방의 둘과는 달리 고문을 당하거나 반말을 듣진 않았다. 해가 바뀐 1980년 2월 초에 수사관으로부터 예편서를 쓰라는 요구를 받았고, 장태완은 이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면서 군생활을 마치게 되었다. 예편서를 쓰기 직전 [[전두환]]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고, 전두환이 직접 찾아와서 만났다고 한다. 이때 전두환은 장 선배라는 호칭을 통해 겉으로는 깍듯이 예우하는 척 하면서도 장태완이 12.12 관련 경위를 묻자 자기들은 책임이 없고 장 선배가 야단법석을 떠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는 식으로 뻔뻔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장 선배가 그러지만 않았다면 장 선배도 중장으로 진급시키고 군단장에 영전시켰을거라면서 이 모든 일은 장태완이 스스로 자초했다는 식으로 변명했다고 한다. 장태완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끔찍한 일을 겪었는데 아버지는 아들이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이 올바르고 소신있는 일을 하다가 패하여 반란군에게 모진 고초를 겪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와 통탄을 하면서 아들에 대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가 "나라에 모반이 있을 때 충신은 모반자들에 의해 살아남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탄하고 [[막걸리]]로 끼니를 대신하다 결국 1980년 4월에 과음으로 별세했다. 장태완은 자신의 불효를 탓하고 한 많은 삶을 마감한 부친에게 "아버님, 이 천하의 불효막심한 이놈을 용서해주지 말아주십시오. 그리고 [[천국]]에 가신 어머님과 영생복락을 누리십시오."라며 통곡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982년에는 외동아들 장성호(당시 21세)가 [[행방불명]]됐다. 12.12 군사반란이 터질 때 장성호는 [[중경고등학교]][* 중경고는 [[김재규]]가 설립한 사립고교로 군인 자녀들이 많이 재학했다. 학교가 당시에 [[서빙고 분실]] 근처에 위치하고 있어 [[제4공화국(드라마)]]에서는 장성호가 중경고에 등교하는 모습을 아버지 장태완이 서빙고 분실 창 밖으로 내다보는 장면이 나온다. 중경고는 이후에 공립학교로 전환됐으며 한강중학교와 교사 위치를 맞바꾸어 2023년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학생이었으며 가택 연금에 보안 요원들이 자꾸 돌아다니는데도[* 장태완 왈 집이 그렇게 넓지도 않은데 요원들이 있는데다 술까지 마셔서 취하면 깽판을 부리는 등 그 분탕질에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고 한다.]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에 입학했고 1982년 자연대 수석을 차지했다. 장성호는 평소처럼 "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하고 대문을 나선지 1달만에 칠곡군 왜관읍 근처에 있는 산기슭[* 공교롭게도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곳 근처였다.]에서 [[참척|시체로 발견]]되었다.[* 시신은 꽁꽁 얼어 눈, 코, 입 외의 모든 구멍에 얼음이 들어차 있었다고 하며 아들의 시신을 수습해 서울로 가는 동안 장태완 장군은 아들의 코와 입에 있던 얼음을 혀로 녹였다고 한다. 차마 서술하기 어려울 정도로 애끊는 부정(父情)이 느껴지는 부분. [[https://youtu.be/54SL_Tip0UU?si=UTQPXj-CvIR9yOf9|#]]] 아들의 묘비명은 장태완이 직접 썼는데 내용은 이렇다. > 故 장성호의 묘. 서울대학교 자연대학 1학년생. 모범 우등생. 여기 채 못다 핀 한 송이 꽃이 최고의 선을 위해 최대의 인고로 향학하다 수석의 영예를 안고 1982년 4월의 짧은 인생을 마치고 고이 잠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