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태완 (문단 편집) === [[전두환 정부]] 시절 === 아들과 아버지를 잃은 장태완은 본인이 두 사람을 죽게 내버려뒀다고 매우 슬퍼했다. 부친의 소식을 듣고는 자신의 [[불효]]를 탓하며 전국 산천을 유랑했고 산꼭대기에선 분노를 고함으로 풀고 평화와 민주 발전을 염원했다고 한다. 아들이 죽은 후에는 "성호는 내가 죽인 것"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이때의 심경에 대해 장태완은 스스로를 "12·12 반란을 막지 못한 국민의 죄인이자 가족 3대를 망친 가문의 죄인"이라고 표현했다.[[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162|#]] 참고로 장태완은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부인이 [[무남독녀]] 외동딸인지라 되도록이면 많이 낳고 싶어했지만 당시엔 산아제한 정책이 펼쳐지던 시대라 장태완은 굳이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허나 훗날 와서 보면 좀 후회도 된다고. 다만 [[하나회]]와 그렇게 사이가 안 좋았음에도 장태완을 회유하려 했는지 어쨌는지[* 하나회 입장에선 자기들이 보기에도 [[하극상]]을 한 거기 때문에 자신들의 뒷날을 위해서라도 다시 포섭할 수 있는 인물들은 최대한 포섭할 필요가 있었다. 또 여담으로 상기한 김상구 건으로 그전부터 사이가 서먹했던 전두환과 달리 노태우는 12.12 이전까진 장태완과 큰 원한 관계도 없었기 때문에 장태완이 해임되고 후임 수경사령관이 되자 장태완 휘하 참모진들을 굳이 대놓고 탄압하진 않았다는 말이 있다. 다만 이후 장태완이 회고하길 자신이 [[체포]]되고 조사받다 군복을 벗게 된 1980년 2월쯤 보안사를 떠나기 전 만난 전두환이 장 선배 덕분에 서울이 뒤집어질 뻔 했니 어쩌니 나라 걱정을 하는데, 이 소리를 들으면서 순간 이 사람들은 군권 장악 정도가 목표가 아니라 [[청와대]]까지 넘보는구나 싶어 아차 했다고 한다.] [[공기업]]인 [[코스콤|한국증권전산]] 사장에 임명하자 이를 수락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같이 반란군에 저항한 [[김진기]] 헌병감같은 경우 반란군들이 설치는 세상이 꼴보기 싫어 군복을 벗고 섬에서 양식업을 하며 두문불출했는데, 훗날 노태우 정부로부터 이런저런 보직을 제의받기도 했지만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정병주]] 특전사령관도 야인으로 지냈고, [[윤성민]] 육참차장같은 경우 회유에 넘어가 국방장관까지 지내긴 하는데, 정작 96년 전두환 재판때는 증인으로 나서 군사반란 맞다고 증언해 뒤통수를 날린다. 참고로 한국증권전산(現 코스콤) 대표이사(사장과 동직책인지 확인 필요) 자리는 주식거래가 활성화된 지금이야 꽤 영향력있는 자리지만 당시에는 증권시장이 막 태동하던 시기라서 그렇게까지 영향력이 크진 않았다.] 아들이 죽은 1982년 이후 어느 날 당시 이한동 민정당 총재 비서실장이 연락해 집안에만 있으면 더 속이 상한다며 직장에서 근무를 통해 슬픔을 잊고 집안도 수습하라고 조언을 했고, 장태완도 거부감이 심했지만 가족 회의 끝에 남은 [[딸]]이라도 살려야겠다고 생각해 수락했다고 한다. 때문에 일각에선 장태완이 훗날 조국을 지킨 의리의 참군인 식으로만 묘사되는 것에 약간의 불편함을 보이는 시각도 존재하는데, [[정병주]] 특전사령관에게도 우린 역사의 증인이니 서로 몸 조심하잔 말을 듣던 장태완 입장을 고려하면 부친도 돌아가신 마당에 외아들마저 의문사를 당했는데 전두환이 기세등등할 무렵 [[어그로]] 끌려봐야 좋을건 없기에[* 실제 쿠데타의 부당성을 언론을 통해 주장하던 정병주 전 사령관은 1988년 행방불명되어 1989년 변사체로 발견되는 의문사를 당한다. 심지어 정병주를 지키다 사망한 [[김오랑]] 소령의 아내 백영옥마저 1990년 하나회 관련 소송을 걸었다가 1991년 의문사를 당한다.] 일단은 [[과하지욕]] 했다고 볼 수도 있다.[* 장태완은 90년대 인터뷰에서 "12·12 쿠데타의 진상을 역사와 국민 앞에 증언할 마지막 임무 하나만 마치고 이승을 하직하겠다는 일념으로 '구차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확실한 건 장태완이 죽을 때까지 전두환을 비판했다는 것이다. 이후 1989년 사장에서 회장으로 추대됐다가, 1995년부터는 훗날 직원 학대와 사기 분양 사건으로 유명해진 건설 기업 [[르메이에르]]로 영전돼 한동안 회장을 [[http://www.rokps.or.kr/profile/profile_view.asp?idx=2117&page=1|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르메이에르의 역사 등을 볼 때 직접적으로 경영했다기보다는 잠시 [[얼굴마담]] 역할을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르메이에르 관련 비리와 장태완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