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택상 (문단 편집) === 미군정기 === 1945년 [[8.15 광복]] 직후 친일파들이 대거 포함된 [[한국민주당]] 결성에 참여해[* 이에 대해서 알려진 비화는 다음과 같다. 장택상이 고향에서 은거하고 있는데 여운형이 명망가인 자신을 안 불러줬다고 삐져있는 상황에서 김성수로부터 급히 상경하라는 전보가 날아들어와 [[서울특별시|경성]]에 오게 되었다. 때마침 [[안국동]] 로터리에서 친구였던 야자 [[이만규]]를 만났고 이만규는 "오 창랑! 마침 자넬 찾고 있었네. 어서 몽양 댁으로 가세."라고 하였으나 "난 선약이 있으니 다음에 만나세"라며 거절해 장택상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아닌 한국민주당에 참여하게 되었다.][* 애초에 [[한국민주당]] 출신이었던만큼 미군정기 초창기때만 하더라도 [[이승만]]보다는 [[송진우(독립운동가)|송진우]]를 더 열렬하게 지지했었다는 주변 지인들의 증언이 있고, 송진우가 암살당했을 때도 빈소에서 대성통곡을 하면서 반드시 고하 선생의 원수를 갚겠다고 말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송진우(독립운동가)|송진우]]가 암살당하게되면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이승만]]과 손을 잡게 되었다.] [[미군정]]에 채용되어 경기도경찰청 경찰부장, 제1관구 경찰청장, 수도경찰청장 등으로 활동하였고 한국 정부 수립 직후 초대 외무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해방 공간에서 경찰 총수로 일하면서 [[좌익]] 및 중도파에 대한 수많은 극우 정치 [[테러]][* 그 외 불법적인 감시, 사찰, 수색, 자산 몰수 등 미군정의 묵인하에 온갖 탄압을 주도했다.]를 주도(혹은 방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좌익 킬러, [[정치깡패]]의 괴수로 알려졌으나 정작 본인은 여운형, 여운형의 사돈 이만규, [[조봉암]] 등의 중도파 및 좌익계 인사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훗날 [[조봉암]]이 이승만에 의해 사법 살인을 당할 때도 [[조봉암]] 선처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이도 이 장택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딸 장병민과 사위 채항석이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조선공산당]] 당원이기까지한 골수 공산주의자이기도 했다.'''[* 장병민 부부의 경우 기본적으로 미군정의 좌익에 대한 탄압때문에 여러번 체포를 당하는 고초를 겪지만 어쨌거나 아버지가 수도경찰청장이었기때문에 이 빽으로 금방 풀려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심지어 아버지가 [[남로당]]을 때려잡을거란 첩보를 미리 입수해서 남로당원들을 미리 대피시켜주는가하면, 아버지의 집을 무려 '''남로당원들의 비밀아지트'''로까지 활용까지 하는 대범함을 보여줬다고. 다만 [[박갑동]]의 증언에 따르면 장병민은 본인의 아버지가 평소에 기생첩을 거느리면서 어머니에게 마음의 상처를 많이 줬기때문에 그만큼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심했다고 한다. 반면 셋째 딸이자 장병민의 여동생 장병혜는 자신의 아버지를 폄하했다는 이유로 드라마 [[서울 1945]]의 제작진들을 고소하기까지 하는가하면 장택상기념사업회까지 운영할 정도로 아버지를 적극적으로 띄우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때문에 여운형과 이만규에게 좌우 대립이 극심하여 목숨이 위험하니 정계를 은퇴하여 시골에 은거하거나 북으로 가라고 권유하지만[* 게다가 본인의 큰딸 장병민과 사위 채항석도 결국 월북을 하는데, 훗날 [[박헌영]]계열로 몰려 이 둘 부부는 [[김일성]] 손에 숙청당하게 되고, 세월이 훨씬 지난 2005년에 이 둘 부부의 사위가 다시 [[남한]]으로 탈북을 하게되는데 오랫동안 '얼굴없는 황장엽'으로 알려져오다 2017년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https://shindonga.donga.com/3/all/13/998695/3|#]] 남한 정착 이후 자신의 장모의 여동생이었던 장병혜와 만남을 가지려고 시도했으나 극렬한 반공성향을 가진 장병혜는 만남을 거절했다고.] 장택상이 단독 정부 수립에 찬성한 한국민주당에 가담했고 미군정에 채용된 수도경찰청장 직위에 있는 상황에서 그의 인정은 이해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특히 [[통일]]에 목숨을 걸었던 정치가 여운형에게는 말이다. 여운형이 암살당한 그날 장택상이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아가자 맏딸 [[여난구]]가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뭐하러 여기왔느냐? 썩 나가라"고 소리질렀고 장택상이 우물쭈물하다가 가버린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한편 이만규는 [[정치가]]라기보다 학자였기 때문에 장택상 조언대로 북으로 건너가서 잘 살게 되었다. 여운형 암살 당시의 정황을 보면 상당 부분 관여 내지는 방조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여운형 암살 당시 [[축구]]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으려 집으로 돌아가던 여운형의 차를 트럭이 막았고 저격이 있었다. 같이 있던 여운형의 [[비서]]가 저격범을 쫒으려하자 옆에 있던 경찰들이 비서를 암살범이라 붙들었다. 당시 경찰 총수가 장택상이었으니 최소한의 관련성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경찰청장을 지내면서 [[악질]] 고문 경관 [[노덕술]] 등을 총애하고 [[의열단]]을 이끈 독립운동가 [[김원봉]]을 조사하고 [[월북]]을 권했고 [[김구]]의 암살에도 개입한 정황이 포착되며 [[발췌 개헌]]이 통과하는데 공헌하는 등 [[근현대사]] [[막장]]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이기도 하다. 다만, 장택상 본인도 독립운동가였고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들도 비슷한 선택을 한 경우가 있어서 시대적 한계로도 볼 수 있다. 장택상뿐 아니라 [[지청천]], [[이범석]], [[손원일]] 등 거물급 독립운동가들도 친일파 출신들을 내치지 않고 기용한 경우들이 있다. [[반민특위]] 해산의 총책임자 [[이승만]]도 개인적으론 극렬 혐일 성향이라서 친일파 등용과는 별개로 대일 정책은 강경 반일을 고수했다. 이는 독립운동가들이 친일파를 안고가려했다고 보기보단, 미군정이 운영을 위해 친일파들을 검토 없이 수용한 상황을 고려해야한다. 일제 치하에서 고위직이나 실무를 담당한 쪽은 대다수가 친일파였고, 미군정은 이들을 일제가 후퇴한 상황에서 [[한반도]]의 운영에 써먹을 자원으로 보았다. 미군정이 들어선 상황에서 친일파의 다수가 그대로 자리를 유지했기에 그들이 원했든 원치않든 같은 직장에서 지내게 된 상황이었다. 훨씬 많은 숫자의 독립운동가들을 포함해 수많은 [[국민]]들이 친일파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긴 했으나 결국 정치적 이유 때문에 무산되었듯이 독립운동가들이 현대의 시각과 달리 친일파를 품어주려 했다는 시각보다는 [[독립]] 이후 [[정치]], [[권력]], [[이념]]이 더욱 중요해진 근현대사와 그 시대의 한계로 봐야 더 합리적이다. 미군정과 장택상, 1공화국 입장에서 보자면 그들은 경력직 경찰 대다수가 친일파였다는 점 때문에 고급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신생 국가 운영에 어쩔 수 없이 필요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장택상은 독립운동가 시절 자신을 직접 고문했던 가창현이란 경찰을 등용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를 권력욕과 정치 구도만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실제로 건준이 친일 경찰을 대신해 치안조직으로 기능할 가능성이 있었다곤 하지만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기에 이러한 주장이 딱히 틀린 것도 아니기도 했고.[* 친일 청산 비교 대상인 북한의 경우 소련군정이 훗날 소련파로 불리는 고려인 경력직 고급 인력들을 대거 들였고 지원도 미군정이 남한에 한 것보다 풍족해 국가 운영에 친일파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다.(출처:이택선,<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 또한, 그런 북한도 일부 친일파들에게 면죄부를 줘서 중용했는데 자세한 것은 [[친일반민족행위자/북한]] 참고.] 그럼에도 노덕술 등 선을 넘은 악질들까지 싸고 돈 점 등은 비판 받을 수 있고 현대사의 아쉬운 점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어쩔 수 없었더라도 당시 친일파 등용이 가장 활발했던 경찰조직은 민중들에게 원성을 샀고 민족주의 중도파 세력 역시 미군정과 1공화국을 크게 비판했다. 북한은 이를 정통성 공격에 효과적으로 이용하며 적화통일을 시도했고. 지금까지 친일청산 문제가 불거지는 것 또한 당시의 인식이 재야에서 이어져 내려온 것이 드러난 것이다.][* 씁쓸한 사실이긴 하지만 원래 식민지 해방이후 [[친일파]]처럼 식민지에 오랫동안 부역해오던 이들이 계속 중용이 된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어난 인류사의 보편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비록 식민지에 부역했단 원죄가 매우 크긴 해도 어쨌거나 특정분야의 가장 특출난 전문가들이다보니 그 분야가 굴러갈 수 있게 하기위해서라도 [[친일파]]들을 중용해서 써먹은 것.] 장택상은 1월 26일 서울 시내 서장 인사 단행시 [[이구범]]을 본정경찰서장으로 임명하기도 했는데, 이구범은 친일경찰 행위로 원한을 사 원한있는 개성 시민들이 광복이 되자마자 집에 불을 지르러 간 친일경찰일 뿐 아니라 항공회사를 설립해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의 전쟁을 도와준 심각한 친일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